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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1장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③: 헤이그특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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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1장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③: 헤이그특사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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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를 환영한 자들

 

 

고종(高宗)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은 그의 친정집이나 다름없는 러시아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07년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열자고 열강에 제안하면서 고종에게 특사를 파견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온 것이다. 회의의 목적은 유럽에 감도는 전운을 해소하자는 것이지만 니콜라이가 굳이 종속국의 지위에 있는 조선에까지 초청장을 보낸 것은 아마 일본에게 조선을 빼앗긴 것을 억울하게 여긴 탓일 터이다. 어쨌거나 국제사회에 조선의 사정을 알릴 매체가 전혀 없었던 고종(高宗)으로선 하늘이 내린 기회나 다름없다당시 유럽 세계에서 태풍의 눈은 독일이었다. 뒤늦게 통일을 이루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나선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전세계의 식민지 분할이 사실상 완료되자 누구보다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일은 같은 처지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맺고 형세의 역전을 도모한다. 그러자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에 긴장한 영국은 라이벌 프랑스에다 오랜 앙숙인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삼국협상을 맺고 삼국동맹에 대비한다(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3장 참조). 국제적 평화회의가 필요해진 이유는 이런 유럽의 정세 때문이었으므로 먼 극동의 사정이 열강 대표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회의를 1년 앞둔 19064월에 일찌감치 이상설(李相卨, 1870 ~ 1917)이 출발했고 1년 뒤에는 이준(李儁, 1859 ~ 1907)이 조선을 떠났다. 두 사람은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 그곳에 체재하고 있던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李瑋鍾,

1887 ~ ?)과 합류해서 19076월 회의 날짜에 맞춰 헤이그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작전 성공이지만 그 다음에는 역시 각오했던 어려움이 따른다. 회의의 분위기나 쟁점이나 식민지ㆍ종속국 문제와는 전혀 무관했으니 이들의 활동이 순탄할 리 없다. 우선 열강은 조선 대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이 된 이상 참가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뒤늦게 사실을 파악한 일본 대표가 유럽 대표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방해 공작을 펴기도 했지만 애초에 유럽 열강에게 조선의 처지를 공감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이준은 현지에서 순국해서 열사가 되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눈물로 이준을 매장한 다음 귀국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러시아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그래도 밀사들이야 돌아오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는 고종은 꼼짝없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조약 체결 이후 초대 조선 통감(統監, 통감부의 책임자인데 아직 조선은 완전한 식민지가 아니기에 총독에 해당한다)이 된 이토는 이완용을 시켜 고종(高宗)에게 사태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면서 제위에서 물러나고 아들에게 섭정을 맡기라고 강요한다. 자신도 어차피 허수아비인 판에 섭정까지 들인다면 허수아비의 허수아비가 되는 셈인데, 아무리 모자라고 못난 고종이라 해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다. 결국 그는 아들에게 양위를 해버렸고, 이로써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 1874 ~ 1926, 재위 1907 ~ 10)이 즉위했다개인적으로는 자존심을 지킨 것일지 모르지만 그 양위는 결국 고종(高宗)의 마지막 실책이 되었다. 아무리 속국의 신세라 해도 조선 조정과 국민들의 정서가 있고, 또 아직 조선은 속국일 뿐 식민지는 아니었으므로 통감부가 조선의 황실을 마음대로 하기는 어려웠다(이완용을 통로로 활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고종에게 진정한 저항의 의지가 있었다면 당연히 통감부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최대한 자리에서 버티었어야 했다(더욱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것실정법을 위반한 행위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랬더라도 식민지화를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일본은 무척 난처한 입장에 빠졌을 테고 다만 몇 년이라도 조선의 식민지화를 지연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긴, 고종에게는 그런 정도의 저항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을까?.

 

 

 바지와 저고리 앉아 있는 늙은 자가 고종(高宗)이고 서 있는 젊은 자는 순종이다. 이들의 명함에는 황제라고 찍혀 있으나 실상 이들은 바지저고리였다. 그래도 쓸데없이 오래 재위했고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탄압 같은 데서나 권한을 발휘한 고종에 비해 처음부터 끝까지 멋모르고 끌려다닌 순종이 조금 낫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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