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성적 인식의 한계
다음으로 반성적 인식과 근본적 회의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장자의 입장을 알아보기 위해서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다른 두 번째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꿈속에서 잔치를 연 사람이 새벽에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새벽에 (즐겁게) 사냥을 하러 나간다. 꿈을 꿀 때,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꿈꾸고 있으면서 꿈속에서 꾼 어떤 꿈을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는 깨어나서야 자신이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단지 완전히 깨어날 때에만, 우리는 이것이 완전한 꿈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매우 자세하게 인식하고 있는 척하며 ‘왕이시여!’ ‘하인들아!’라고 말하는데, 진실로 교정할 수 없을 정도로 고루한 사람들이구나! 나와 당신도 모두 꿈이고, 당신을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도 또한 하나의 꿈이다.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而愚者自以爲覺, 竊竊然知之. “君乎! 牧乎!” 固哉! 丘也與女皆夢也, 予謂女夢亦夢也.
사유와 인식의 기저에는 의식의 자기동일성, 즉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유와 인식은 파편화되고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앞에 있는 의자가 의자라는 것을 인식하거나 사유한다는 것, 즉 의자가 의자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전자(주어로서의 의자)를 의식하는 나와 후자(의자라는 술어)를 의식하는 나가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이처럼 나의 자기로의 복귀, 즉 인칭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동일한 것일 수 있을까? 단지 과거의 나나 현재의 나는 모두 나라는 용어로 자신을 지칭했다는 점에서만 같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항상 나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에 내가 자기동일적으로 존재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의 나, 고등학교 때의 나, 대학교 때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나아가 노인이 되었을 때의 나는 과연 같은 것인가? 이 모든 경우에 나로 지시되는 것은 같은 인격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지 문법적인 착각(grammatical illusion)일 뿐이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은 자서전이라는 것을 쓴다. 자서전은 이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희박해졌을 때 회고적으로(retrospectively) 쓰는 글이다. 자서전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나일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 밑에서, 몇 번째로 태어났다든가, 아니면 나는 어느 학교에 가서 어느 선생을 만났다든가, 혹은 나는 누구를 만나서 결혼했다는가 등등. 그러나 자서전이 가치가 있으려면 그것은 자신이 만난 타자들에 대한 기록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타자와 만날 때마다 나는 어떻게 다르게 생성되었는지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자서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서전은 ‘자신이 만난 타자들과 그로부터 기원하는 나 자신의 생성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서전의 진정한 주인은 나가 아니라 타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란 단지 비어 있는 형식, 타자들이 묵고 돌아가는 여인숙과 같은 곳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동일성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동일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장자에 따르면 왕이라고 불리는 사람도 왕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고, 목동이라고 불리던 나도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나의 본질적인 자리인 양 착각하면서, ‘나는 왕이다’라든가 아니면 ‘나는 목동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착각은 기본적으로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인칭성을 근거로 우리는 반성을 한다. 장자는 그것을 꿈꾸고 있으면서 그 꿈속에서 꾼 꿈의 의미를 점친다는 비유로 분명하게 밝혀준다. 꿈꾸고 있는 나는 인칭적인 나이고, 꿈속에 꾼 꿈의 의미를 헤아린다는 것은 자신을 반성한다는 것이다. 장자가 보았을 때 이것은 단지 자신의 꿈을 무한히 증식시킬 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그 다음에 이것을 반성해보고 또 그 반성을 반성해보자. ‘나는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안다.’ 등등. 이처럼 반성이 아무리 심오해 보여도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인칭적인 나가 자리를 바꾸면서 반복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