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내가 원하는 것과 타자가 원하는 것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항상 어떤 고독을 동반한다는 것도 경험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나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에 빠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분명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로 하여금 내가 하듯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사랑의 고독을 안겨다줍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 흔히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냥, 이렇게 멀리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아니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미 사랑하고 있
다면?’ 노창선(1953~)【노창선은 1975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시 「잠의 사원」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을 주로 노래했다. 그는 고독과 단절의 이유를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부재한 데서 찾고 있다. 최근에는 자연과의 관계와 생명에 대한 시작에 몰두하고 있다. 주요 시집으로는 『섬』, 『난꽃 진 자리』, 『오월의 숲에 와서』 등이 있다】이란 시인은 아마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마치 섬처럼 고독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다음은 시인이 지은 「섬」이라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내가 이룬 섬의 그 어느 언저리에서
비둘기 한 마리 밤바다로 떠나가지만
그대 어느 곳에 또한 섬을 이루고 있는지
어린 새의 그 날개 짓으로
이 내 가슴속 까만 가뭄을
그대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 「섬」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 즉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사람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그건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할지, 나의 서툰 고백을 받아줄지, 나는 전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하나의 섬으로 다가옵니다. 그 속에 누가 사는지, 또한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는, 내가 한번도 발을 디디지 못한 섬 말이지요. 나는 밤에 몸을 뒤척이며, 아무도 모르는 사이 나의 마음을 비둘기에게 전해 띄워 보내봅니다. 어두운 밤이기에 그 새가 사랑하는 나의 연인에게 도달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점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나를 완전히 떠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사랑에 빠진 나는 나 자신을 점차 하나의 섬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섬을 떠나 그 사람의 섬으로 갈 수 있을까요? 방법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아쉽게도 지금 어떤 분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아름답긴 하지만 너무 낭만적이고 소심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 분들은 자신이 한때 빠져들었던 고독과 불면의 밤을 기억할 겁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건넸던 자신의 손을 상대방이 따뜻하게 잡아주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참으로 사랑은 하나의 비약이자 축복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자, 남모르던 타인이 나의 손을 잡아주는 경험이니까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 타인은 나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검푸른 바다에 가로 막힌 섬과 섬이 만나는 기적처럼 하나의 놀라운 사건, 어떤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사건입니다. 고독, 설렘, 비약, 기적 등이 없다면 사랑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섬으로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절망했습니까?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혹여 사랑하는 상대방을 자신처럼 환희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전에 여러분은 바다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는 섬처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그 사람과 여러분 자신이 하나가 되었다고 확신하지는 않습니까? 장자는 사랑에 있어 이런 착오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까요?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장자』 「지락(至樂)」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于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장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나라 임금이 누구나 인정할 만큼 새를 아끼고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랑이 끝내는 자신이 사랑하던 새를 죽음으로 이끌고 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어떤 비극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사랑이 오히려 사랑하는 타자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유로 인해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노나라 임금이 사랑하는 새에게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그 새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나라 임금이 새에게 베풀었던 애정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맛있는 술을 권하기, 궁정 음악을 연주해주기, 맛있는 고기를 먹이기 등등.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호의를 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새에게는 이런 것들이 모두 괴로운 시달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흘 만에 노나라 임금의 애정 표현에 놀란 바닷새는 슬픈 최후를 맞게 됩니다.
여러분, 노나라 임금의 슬픔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사랑을 극진히 표현했건만, 그 결과는 도리어 참혹했습니다. ‘왜 너는 죽고 만 거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아마 바닷새의 시신을 가슴에 품고서 임금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왜 바닷새가 자신의 곁을 영원히 떠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때 장자는 불쌍한 노나라 임금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줍니다. 그의 비극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요. 다시 말해 노나라 임금은 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새에게 해주기를 원했던 것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극이 발생했던 것이지요. 차라리 노나라 임금과 바닷새는 만나지 않았던 것이 더 좋을 뻔했습니다. 혹은 만났더라도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겠지요. 결국 우리가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혹은 사랑이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진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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