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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타자란 무엇인가?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타자란 무엇인가?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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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란 무엇인가?

 

 

노나라 임금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를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이끌어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게 될 수도 혹은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의 규칙이 나와 완전히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란 바로 차이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노나라 임금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규칙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맛있는 술을 권하기, 궁정 음악을 연주해주기, 맛있는 고기를 먹이기 등 그가 행했던 애정 표현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바닷새가 인간 사회의 규칙에 적응했었다면, 따라서 인간에게 타자가 아니었다면, 이 새는 노나라 임금의 애정에 무척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나라 임금과 마주친 바닷새는 자신만의 삶의 규칙에 따라 살고 있던 존재입니다. 바닷가에서 벌레 잡아먹기, 다른 새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등이 바로 바닷새 자신의 규칙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를 보고 그 새만의 삶의 규칙을 곧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 불가능했을 겁니다. 타자가 가진 고유성, 즉 타자성은 감각적으로 직접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타자의 외모를 보고서 우리는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와 만나서 부딪히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람이 나와 다르구나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명확히 타자의 삶의 규칙, 타자성을 다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 이 점에서 그 사람은 나와 같지 않구나라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상대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만약 부정적인 방식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식으로 타자의 타자성을 규정할 수 있다면, 이미 나와 만난 그 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타자가 아닐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긍정적인 규정은 내가 타자와 삶의 규칙을 공유하게 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타자의 삶의 규칙을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타자가 나의 삶의 규칙을 받아들인 경우에만, 우리에게는 낯선 타자란 것이 소멸하게 됩니다.

 

장자는 2000여 년 전 타자를 발견했고, 그 타자와의 소통을 모색했던 사상가입니다. 이와 달리 서양에서는 타자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다 진지한 논의는 레비나스(E. Levinas, 1906~1995)레비나스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하여 활동했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적 시도는 형이상학을 윤리학의 기초 위에 세우려는 데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윤리학은 타자차이를 긍정할 수 있지만, 형이상학은 윤리학과는 달리 동일성만을 긍정하려는 폭력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조교였던 데리다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요 저서로 전체와 무한, 시간과 타자등이 있다라는 철학자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집니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심화시키기 위해 여기서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지요.

 

 

플라톤은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매우 특이한 점을 전혀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그는 이데아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기본 개념으로 보통 형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의자가 하나 있다고 해보자. 플라톤은 이 의자가 의자라는 형상과 의자를 구성하는 질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것은 의자가 망가지더라도 의자의 형상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는 점이다. 변한 것은 단지 질료일 뿐이기 때문이다의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 공화국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빛의 세계, 시간이 없는 세계의 철학을 만들었던 것이다. 플라톤 이후부터 사람들은 사회적인 것의 이상을 융합(하나됨)의 이상에서 찾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를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고, 마침내 집단적 표상이나 공동의 이상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라고 말하는 집단성, 다시 말해 인식 가능한 진리의 태양을 바라보면서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자로 인식하는 집단성이다. 이것은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행하는 제3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성이다. (하이데거의) ‘서로-함께-있음(Miteinanadersein)’함께(mit)’의 집단성에 머물러 있고, 진리를 매개로 그것의 본래적 형식 안에서의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은 어떤 공통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성이다.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

 

 

레비나스는 플라톤플라톤은 서양철학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현대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모든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은 변화하는 질료와 불변하는 이데아라는 두 가지 계기를 도입했다. 육제와 정신, 현세와 피안을 구분하는 서양철학사의 주류 전통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주요 저서로 국가, 테아이테토스, 티마이오스등이 있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이 타자의 문제를 제대로 사유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불리는 공통된 태양을 생각했습니다. 이데아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기 때문에, 플라톤이 꿈꾸었던 세계는 시간이 없는 세계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태양 아래서 동일한 빛을 받고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이데아에 의해 동일하게 규정됩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세계에서는 타자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삶의 규칙을 우리와 공유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타자인데, 플라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이데아라는 절대적인 삶의 규칙을 공유하기 때문이지요. 레비나스는 플라톤에서 하이데거까지의 서양철학사가 타자를 나와 동일한 규칙을 가진 존재로 사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공통된 규칙을 가진 존재는 이미 우리에게 낯선 타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존재는 단지 우리라는 동일한 집단에 속해 있는, 나와 같은 구성원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요. 이런 서양철학의 경향은,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자신과 동일한 삶의 규칙을 공유하는 존재로 간주했던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레비나스는 이 점과 관련해 서양철학이 항상 타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합니다.

 

사실 그가 평생 타자 문제를 사유했던 이유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레비나스는 잔혹한 학살의 이면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양철학의 주체 중심주의를 찾아냈던 것이지요. 만약 레비나스가 말했던 것이 옳다면 서양철학은 거대한 유아론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아론은 단순히 나만이 존재한다는 식의 협소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확장된 의미의 유아론을 의미하지요. 서양철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규칙이 보편적인 동시에 유일한 삶의 규칙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협소한 의미의 유아론보다 확장된 의미의 유아론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협소한 유아론은 우리를 고독한 주체로 만들어 타자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도록 만들지만, 타자에게 극심한 폭력을 가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확장된 유아론은 자신이 믿고 있는 삶의 규칙을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함으로써 결국 폭력과 억압을 낳을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서양 사람들 중 일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사실을 두고 매우 야만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나아가 그것을 금지하려고 자신의 정부에 압력을 넣거나, 아니면 직접 우리 정부에 서한을 보내기도 하지요. 문제는 이런 서양 사람들의 행동에는, 자신들은 계몽되어 있지만 우리는 아직 계몽되지 못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과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삶의 규칙에서는 라는 동물이 친구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 한국 사회의 삶의 규칙에 따르면 는 힘든 농사철의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미 맥락이 다르다고 해서, 자신의 문명이 지닌 의미 체계를 일방적으로 다른 문명에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내가 가진 의미 체계를 다른 사람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식의 유아론은 표면적으로는 유아론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런 착각 때문에 확장된 유아론이 타자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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