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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카자흐스탄 여행기 - 59.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下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카자흐스탄 여행기 - 59.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下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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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할머니의 성함은 지순옥으로 연세는 92세라고 했다. 1937년에 원동遠東(머나먼 동쪽)의 쁘리모르스키끄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에 살고 계셨단다. 남자들은 강제이주 전에 이미 잡혀갔기 때문에, 이 당시엔 엄마와 같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으로 가라는 교사의 지시가 있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엄마와 기차를 탔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에 오기 전까지는 고려인에 대한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이곳에서 직접 만나고 나선 그 무지에 깜짝 놀랐다.  

 

 

 

설국열차를 방불케하는 생존의 현장

 

 

기차는 화물칸으로 120명가량의 사람이 탔는데, 자신의 엄마는 열흘 정도 먹을 것을 가지고 탄 반면, 아무 것도 없이 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물은 빗물로 해결했으며, 대소변은 양동이에 받아놨다가 열차가 쉴 때마다 버렸다고 한다. 영양실조와 비위생적인 환경, 그리고 추위로 사람들은 죽어갔다. 죽은 시체는 화물칸 한 곳에 쌓아뒀다가 기차가 강을 지날 때 버렸다고 한다.

문제는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었단다. 그런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살아있는데도, 목에 돌덩이를 매달아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그렇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기차는 계속 달리지 않고 어떠한 연유에선지는 모르지만 며칠씩 서있기도 했단다. 그럴 때 밖에 나가 몸에 두른 천으로 먹을 것을 교환하며 목숨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영화 설국열차의 꼬리칸의 상황이 이와 같았을 거란 상상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영화보다 그 당시의 상황은 더욱 가혹했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적어도 영화에선 살기 위해 기차를 탄 것인데 반해, 현실에선 왜 타야하는지도 모르게, 자신이 여태껏 이루어왔던 기반 자체가 완전히 뿌리 뽑히는 걸 어쩌지 못한 채 쫓겨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지순옥 할머니 댁으로 들어가는 우리들. 

 

 

 

허허벌판이었던 우슈토베가 농경지가 된 까닭

 

누군가 그런 어수선한 틈을 타서 도망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서는 곳마다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에 도망친들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러지 않았다고 대답해주셨다. 고려인 중 극히 일부는 이미 이주 정책 소식을 듣고 준비한 가족도 있었다고 한다. 어제 초기 정착지를 소개해주신 고려인 3세 할머니의 어머니는 기차가 아닌 배를 타고 중앙아시아에 왔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극소수의 경우 그런 특별한 경우도 있었나 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슈토베까지 7일이면 가는데 무려 한 달이나 걸려서 도착했단다. 9월에 출발한 기차는 우슈토베에 도착했고 많은 사람이 내렸지만, 할머니는 조금 더 가서 카라간다Қарағанды에 내렸다고 한다. 거기서도 토굴에서 생활하며 6개월 정도를 버텼는데 갈대를 깔고 자면 횡재한 것이었고, 대부분은 맨 땅에서 그냥 몸을 뉘어야 했단다. 거긴 소금기가 있는 모래땅이라 50~70를 걸어가야지만 갈대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많은 아이들이 죽어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385월에 우슈토베로 왔으며 그 때부터 줄곧 여기서 살았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슈토베까진 7일 걸리는데, 무려 한 달 만에 도착했다고 한다.   

 

 

우슈토베에선 하루 종일 농사를 지었단다. 농기구가 없으니, 맨손으로 땅을 파서 씨를 뿌리고 논으로 만들었단다. 초기정착지 근처엔 수많은 논과 밭이 생겨났다. 고려인들은 황무지에 논과 밭을 만들어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소련이 망한 후,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원동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논과 밭은 다시 황무지가 되어 버렸다.

 

 

광활한 황무지였던 우슈토베가 농경지로 바뀌었다. 그속엔 고려인의 피눈물이 있다.  

 

 

 

구슬픈 우리 가요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시대가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며 기구한 삶이 남긴 아픔 같았다. 할머니는 한국 사람들이 왔다고 하니, 반갑게 창가를 불러주셨다. 구슬픈 음색은 고려인들의 기구한 삶과 닮아 보여 가슴 깊은 곳을 훑고 지나갔다. 울컥 눈물이 날 뻔 했다.

자대인 철원에 배치 받고 군 생활하던 어느 날 저녁의 그 기분이 몹시도 떠올랐다. 다신 고향 산천을 밟을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 내가 알던 사람들을 다신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함이 엉키고 설켜 침낭을 덮어쓰고 울음소리를 꾹꾹 참으며 울던 때가 떠오른 것이다. 그건 나의 연약함이었으며 울분이었다. 할머니의 창가소리엔 그와 비슷한 한과 울분이 깊게 배어 있었다.

 

 

고국산천을 떠나서 수 천리 타향에

산 설고 물 선 타향에 객을 정하니

섭섭한 생각은 고향뿐이요

다만 생각나나니 정드신 친구라 - 망향가

 

 

 

   

우리에게도 불러 보라고 하여 아리랑도라지를 불러 드렸다. 막상 옛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니, 앞이 막막하더라. 학창시절엔 거의 창가를 부르지 않았으며 사회인이 되어서는 더욱 더 부를 일이 없었다. ‘늴리리야’, ‘밤타령등은 첫 소절만 생각나지 뒤는 전혀 생각나지도 않았다. 우리의 과거 노래들이 잊혀지고 무관심의 대상이 되는 만큼 우리 또한 과거와 단절되어 가고 있다. 이런 노래가 어색해진만큼 할머니와 우리 사이엔 세대차이를 넘어선 시대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시대차이를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우린 더 이상 한민족韓民族이 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게 되는 거겠지.

우리의 노래가 영 심통치 않으신지, 할머니는 다시 여러 곡의 창가를 불러주셨다. 할머니가 부른 노래들은 아마 말로는 다 하지 못했던 어떤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어서 였던 것이리라. 당연한 것이기에 소중함을 몰랐던 것들에 대해, 할머니는 창가를 통해 당연하지도 않으며 지극히 소중한 것이야라고 알려주는 듯 했다.

 

 

 

고려인의 한이 깊게 배어 있는 지순옥 할머니의 창가 한 마당.  

 

 

 

목차

사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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