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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판타지아(fantasia)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판타지아(fantasia)

건방진방랑자 2021. 7. 10.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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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아(fantasia)

 

 

등불이 노끈에 이어져 저절로 불이 붙어 타오른다. 노끈을 따라 타면서 또 다른 등불로 이어진다. 4~50등이 일시에 타면서 주위가 환하게 밝아진다. 1천여 명의 미모의 남자들이 비단 도포에 수놓은 비단 모자를 쓰고 늘어섰다. 각각 정자 지팡이 양쪽 끝에 모두 조그만 붉은 등불을 달고 나갔다 물러섰다 하여 군진(軍陳) 모양을 하더니 순식간에 삼좌(三座) 오산(鼇山, 자라 등 위에 얹혀 있었다는 바닷속 산으로 신선이 산다고 함)으로 변했다가 다시 일순, 변해서 누각이 되고, 또 졸지에 네모진 진형으로 바뀐다. 황혼이 되자 등불빛은 더욱 밝아지더니 갑자기 만년춘(萬年春)’이란 석 자로 변했다가 갑자기 천하태평(天下太平)’ 네 글자로 변한다. 이윽고 두 마리 용이 되어 비늘과 뿔과 발톱과 꼬리가 공중에서 꿈틀거리면서 경각 사이에 변환하고 헤쳐 모이되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글자획이 완연한데, 다만 수천 명의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다. 열하에서 황제와 함께 관람한 연극의 한 장면이다. 당시 청나라의 화려한 무대와 연기수준을 짐작케 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 「만년춘등기(萬年春燈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연암은 호기심의 제왕이다. 뭐든 그의 시선에 걸리면 그냥 무사히 넘어가지 못한다. 왕성한 식욕의 소유자처럼 대상들을 먹어치우는 것이다. 위의 장면만 해도 그렇다. 화려한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축하쇼를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특별한 의미가 있건 없건 신기하고 새로운 건 무조건 기록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것이다. 그가 이름난 유적이나 역사적 기념비 못지않게 장터를 즐겨 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장터야말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로 그득하다. 그는 장터의 활기와 무드를 충분히 즐기면서도 세심하게 그 이면을 읽어낸다.

 

예컨대 도강록(渡江錄)」 「관제묘기(關帝廟記)에는 장터에서 광대패를 만난 경험이 기록되어 있다. 광대패 수천 명이 왁자하게 떠들면서 혹은 총과 곤봉을 연습하기도 하고, 혹은 주먹놀음과 씨름을 시험하기도 하며, 혹은 소경말, 애꾸말을 타는 장난들을 하고 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앉아서 수호전을 읽는데, 뭇 사람이 삥 둘러앉아서 듣고 있다. 연암이 가까이 가서 보니 읽고 있는 곳은 분명 화소와관사(火燒瓦官寺, 수호전의 한 장의 대목)인데, 외는 것은 뜻밖에 서상기(西廂記)였다.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한편, 형부 앞을 지나다 불쑥 들어가서 죄인에게 따귀를 때리는 형을 가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고, 또 시장을 돌아다니다 최고위급 관리들이 직접 시장에 나와 물건을 흥정하는 장면을 보고 놀라워하기도 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습속이기 때문이다.

 

장터의 스피노자(Spinoza, 1633~1677)’ 연암, 그가 마주친 것 가운데 가장 멋진 스펙터클은 요술세계이다. 환희기(幻戱記)」 「환희기서(幻戲記序)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는 어느 날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를 지나다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요술을 구경하는 장면을 목도한다. 유학자로서 요술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연암은 경직된 도덕의 수호자가 아니라, 일단 신기한 것은 보고 즐기는 호모 루덴스아닌가. 좀 캥길 때는 명분을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해두는 치밀함도 갖추고 있다. 누군가 이런 요술하는 재주를 팔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래 나라의 법 밖에서 활동하는 것인데도 그들을 처벌하여 멸절시키지 않음은 무슨 까닭입니까[售此術以資生 自在於王法之外而不見誅絶何也]?” 하고 묻자, 연암은 이렇게 답한다.

 

 

중국의 땅덩어리가 워낙 광대해서 능히 모든 것을 포용하여 아울러 육성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병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천자가 이를 절박한 문제로 여겨서 요술쟁이들과 법률로 잘잘못을 따져서 막다른 길까지 추격하여 몰아세운다면, 도리어 궁벽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꼭꼭 숨어 때때로 출몰하면서 재주를 팔고 현혹하여 장차 천하의 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

所以見中土之大也 能恢恢焉並育 故不爲治道之病 若天子挈挈然與此等較三尺 窮追深究 則乃反隱約於幽僻罕覩之地 時出而衒耀之 其爲天下患大矣

 

그래서 날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요술을 하나의 놀이로서 보게 하니, 비록 부인이나 어린애조차 그것이 속이는 요술이라는 것을 알아서 마음에 놀라거나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임금 노릇 하는 사람에게 세상을 통치하는 기술이 되는 것입니다.

故日令人以戱觀之 雖婦人孺子 知其爲幻術 而無足以驚心駭目 此王者所以御世之術也哉

 

 

얼마나 노회한 논리인가.

 

어찌됐든 이렇게 해서 연암은 이상하고 신기한 요술나라로 들어간다. 스무 가지가 넘는 요술이 펼쳐지는 환희기(幻戱記)는 한마디로 판타지아그 자체이다.

 

먼저, 워밍업에 해당하는 묘기부터.

 

요술쟁이가 자기 손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인 다음 왼손 엄지와 둘째 손가락으로 환약을 만지듯 살살 비비니 갑자기 좁쌀만 한 물건이 생겼다. 이것이 녹두알 앵두알 빈랑(檳榔) 달걀 거위알 수박 다섯 말들이 크기의 제공(帝工, , 코 없는 주머니처럼 생긴 귀신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험프티 덤프티를 떠올리면 될 듯)으로 바뀌다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점점 줄어들어 두 손가락으로 비비다가 한 번 튀기니 즉시 사라진다.

 

종이 몇 권을 큰 통 물 속에 집어넣고 손으로 종이를 빨래하듯 저으니 물 속에 섞였다가 다시 종이를 건져내는데 종이가 서로 이어져 처음의 모습과 똑같고, 물은 깨끗하다.

 

이것이 시각적 판타지라면, 다음 것들은 좀더 입체적인 판타지에 해당된다.

 

종이를 나비 날개처럼 수십 장을 오리고 손바닥 속에서 비벼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고는 한 어린아이에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라 하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우니 어린이는 발을 구르면서 운다. 요술쟁이가 웃으면서 손을 떼니 어린이는 울다가 토하고 또 울다가 토하는 데, 청개구리 수십 마리를 토한다.

 

손을 보자기 밑에 넣어 사과 세 개를 끄집어내어 조선 사람에게 사라고 청한다. 그러자 네가 전일에 항상 말똥으로 사람을 희롱한단 말을 들었거든[聞汝往日 常以馬矢戱人].”하며 거절한다.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사먹는 걸 보고서야 조선 사람이 비로소 사자고 청하니 요술쟁이는 처음에는 아끼는 듯하다가 얼마 뒤에 한 개를 집어준다. 한입 베어 먹고는 바로 토하는데, 말똥이 한 입 가득 차 있다. 이어지는 폭소. 조선인의 완고함과 오만함에 대한 통렬한 풍자!

 

섬뜩한 장면도 있다. 요술쟁이가 칼을 던져 입을 벌리니 칼 끝이 바로 입 속에 꽂힌다. 칼을 삼키는데 병을 기울여 무엇을 마시듯 목과 배가 서로 마주 응하는 것이 성난 두꺼비 배처럼 불룩하다. 칼고리가 이에 걸려 칼자루만 남자, 요술쟁이는 네 발로 기듯이 칼자루를 땅에 쿡쿡 다져 이와 고리가 맞부딪쳐 딱딱 소리를 낸다. 또 다시 일어나서 주먹으로 칼자루 머리를 치고서 한 손으로 배를 만지고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내두르니 뱃속에서 칼이 오르내리는 것이 살가죽 밑에서 붓으로 종이에 줄을 긋는 듯하다. 사람들은 가슴이 섬뜩하여 똑바로 보지 못하고, 어린애들은 무서워 울면서 안 보려고 엎어지고 기어 달아난다. 이때에 요술쟁이는 손뼉을 치고 사방을 돌아보며 천천히 칼을 뽑아 두 손으로 받들어 들으니 칼 끝에 붙은 핏방울에는 아직도 더운 기운이 남아 있다.

 

놀랍기는 하지만, 여기까지는 요즘 요술쟁이들도 어느 정도 따라할 법하다. 정말 믿기지 않는 건 다음 대목이다. 요술쟁이는 탁자 위를 깨끗이 닦고 도서를 진열하고 조그만 향로에 향불을 피우고 흰 유리 접시에 복숭아 세 개를 담아 두었는데, 복숭아는 모두 큰 대접만 했다. 탁자 앞에 바둑판과 검고 흰 바둑알을 담은 통을 놓고 초석을 단정하게 깔아 놓았다. 잠깐 휘장으로 탁자를 가렸다가 조금 후에 걷으니, 구슬관에 연잎 옷을 입은 자도 있고, 신선의 옷차림을 한 자도 있으며, 나뭇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있는 자도 있고, 혹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기도 하며, 혹은 지팡이를 짚은 채 옆에 서 있기도 하고, 혹은 턱을 고이고 앉아서 조는 자도 있어 모두가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들이 기이했다. 접시에 있던 복숭아 세 개가 갑자기 가지가 돋고 잎이 붙고 가지 끝에 꽃이 피니, 구슬관을 쓴 자가 복숭아 한 개를 따서 서로 베어 먹고, 그 씨를 땅에 심고 나서 또 다른 복숭아 한 개를 절반도 못 먹었는데 땅에 심은 복숭아 나무는 벌써 몇자를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갑자기 바둑 두던 자들의 머리가 반백이 되더니 이윽고 하얗게 세어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영화의 특수효과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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