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는 글: 인연론
살아가면서 가장 큰 자산은 돈도 명예도 아닌 인연이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쳐, 일으키는 수많은 변곡점變曲點이 인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풍부함이란 게 긍정적인 방향의 변화일 수도, 부정적인 방향의 변화일 수도 있다. 그게 설혹 부정적인 변화를 동반한다 할지라도 악연惡緣이라고 단정 지어선 안 된다. 어떤 책에서 나온 글처럼, 그 당시의 나에게 있어서는 악연이었다 할지라도 다른 상황, 다른 순간에 만나면 전혀 다른 인연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하기에 ‘어떠할 것이다’라고 미리 선을 긋고 앞뒤 재며 우유부단하게 멈춰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와 마주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힐 수 있도록 부단히 나아가야만 한다.
▲ 인연과 어떻게 마주치느냐에 따라 삶의 행로가 바뀐다.
인연에 대한 오해
그런데 인연이란 단어를 쓰다 보면, 혹 因緣을 人緣human relation으로 오인하는 일도 생긴다. 무수한 생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인간이 중세시대의 터널을 지나며 신의 대리인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 되었다. 더 이상 무수한 생물 속의 한 종이 아닌, 그 생물들을 이끌며 지배할 수 있는 절대권자가 된 것이다. 그 후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화에 접어들어 자연까지 완벽하게(?) 정복하게 되면서 ‘관계’라는 말을 운운할 때조차, ‘사람-사람’과의 좁은 관계망만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人緣으로 관계망이 협소해지게 된 데엔, 그와 같은 인간중심주의적인 인식의 흐름이 있었다.
▲ 가운데 두 사람 중 하늘을 가리키는 이가 플라톤, 아래를 가리키는 이가 아리스토텔레스다.
인연이란 단어의 원의
하지만 원래 불교용어인 인연은 그와 같이 협소한 의미가 아니었다. 인간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생물, 심지어는 무생물의 경계까지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 그리고 지금껏 읽어왔던 모든 책들, 그 모든 게 인연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주쳐 공명하였고 변화의 지점을 만들어냈다면, 그게 바로 인연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책이나 영화 같은 공산품이 인연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고, 그건 너무 막무가내의 해석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의 정수인 책이나 영화 같은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만들어지는 순간부터는 새로운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더 이상 작자의 의도대로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물死物이 아니라, 자신만의 생명력으로 자생하는 사물私物이 되는 것이다. 私物은 독자나 관람객과 마주치며(소통하며)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면서 또 다른 작품으로 변모해 간다. 성경의 구절마다 달린 주석註釋들과 경서의 경구마다 달린 주해註解들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해석에 따라 경서와 성경의 내용이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지 보여주니 말이다. 책이 해석자와 마주쳐 공명한 결과물이 주석이며 주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마주침의 결과물로 인해 책의 내용은 더 풍성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人緣으로 한정지어 생각하던 인식의 관념을 넘어서 因緣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점점 죽음으로 다가가는 ‘운명론적인 인간’에서 벗어나 뭇 인연들과 마주치고 공명하여 나날이 새롭게 변해가는(日新又日新) ‘인연론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인연에 대한 이야기, 즉 무엇과 어떻게 마주쳐서 공명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 마주침은 돌베개 출판사와의 마주침이고, 두 번째 마주침은 출판사에서 기획한 『탐욕의 제국』과 『다이빙벨』이란 영화와의 마주침이다.
▲ 주석은 성경의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성경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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