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방황의 시간을 함께 해준 16명의 철학자와 16편의 영화
이야기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혹은 이야기하기조차 금지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바로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의 문화적 파워가 아닐까. 철학자와 영화 사이의 커플 매니저를 자청한 것도, 어쩌면 나 자신이 아주 서툰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네필 다이어리』는 커다랗게 구멍을 내버린 내 마음의 창 너머로,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세상을 향해 나 자신의 부끄러운 속내를 속속들이 내보이고야 말았다. 내가 사랑한 철학자들과 함께 관람한 이 영화들이 우리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미처 꾸지 못한 꿈들의 잔해를 모아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감히 상상해본다.
누군가 실제로 살 수 있었던 삶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야 했던, 그러나 살지 못했던 삶까지 인간의 언어 속에 살아가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야기의 힘 아닐까. 우리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우리들의 ‘이야기’만은 살아남아 아스라한 기억의 별자리를 그려낼 것이다. 영화는 생생한 현재를 단 두 시간의 러닝타임에 담아 ‘옛날 옛적에’로 만드는 시간의 마법이다. 우리는 그 시간의 마법 덕분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시공간을 ‘우리들의 시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 기나긴 방황의 여정을 고독하지 않게 만들어준 16명의 철학자들과 16편의 영화를 향해, 그리고 가끔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네필 다이어리』의 갈팡질팡한 걸음걸이조차 밉지 않게 바라봐 준 소중한 독자 여러분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여러분과 함께한 시간이 비틀거리는 나를 버티게 했다. 이 책은 기억 속에서만은 영원히 늙지 않을 내가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스무 살을 향한 기나긴 연애편지였다. 그 감각이 인생에서 기장 예민하게 발달하는 시기이긴 하지만 유독 ‘외로움’을 느끼는 감각만은 너나없이 천재적이었던, 한여름에도 살을 에는 외로움에 떨던 우리의 끝나지않은 스무 살을 항해, 이 책을 바친다.
P.S.
『시네필 다이어리』라 불리는 마음의 뗏목을 끝까지 저어나갈 수 있게 해준 보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자음과모음’의 멋진 에디터 임선영 님과 배성은 님과 이진아 님, 디자이너 배현정 님과 여만엽님, 일러스트레이터 ‘삐뚤어진선’님, 『시네필 다이어리』라는 무모한 프로젝트를 망설임 없이 떠맡아주신 강병철 사장님과 정은영 주간님께 같은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닥치는 원고 마감과 숨길 수 없는 사유의 빈곤으로 만신창이가 된 게으름뱅이 룸메이트를 향해 변함없이 순하게 웃어준, 나의 살아 있는 토토로 이승원 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시네필 다이어리』는 우리가 함께 한 소중한 시간의 나룻배였습니다.
뱀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결코 선택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인종, 국적, 가족, 유전자 등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 우리의 정체성이 구성된다. 그러나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들은, 정말 나다운 것인가,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정말 자율적이고 자발적인가.
미셀 푸코는 ‘나를 다답게 만드는 것’들과 현대인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감사하고 통제하는 사회의 규율 권력을 탐구했다. 푸코는 우리들이 어떻게,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지만 지금 행복하지 않고, 우리의 삶이 너무 많은 제약과 차별과 억압으로 찌들어 있음을 우리 스스로 느낀다면 우리가 ‘정체성의 원형감옥’을 탈출할 수 있도록 저항 지점과 통로가 그려진 지형도를 그려준다.
'책 > 철학(哲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노희락의 심리학 - 사상체질 (0) | 2021.12.22 |
---|---|
정여울의 시네필 다이어리 - 목차 (0) | 2021.07.28 |
시네필 다이어리, 대책 없는 기다림. 무적의(?) 학습 비법 - 2. 영화 속 주인공과 우리들의 닮은 상처 (0) | 2021.07.28 |
시네필 다이어리, 대책 없는 기다림. 무적의(?) 학습 비법 - 1. 영화야말로 철하고가 접신할 수 있는 안테나 (0) | 2021.07.28 |
시네필 다이어리,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너’와 ‘나’를 넘어 ‘그 사이’에 존재하기 위하여] - 18.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를 긍정하는 법 (0) | 2021.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