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심하라
1.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들은, 정말 나다운 것인가
죄수의 첫 번째 의무는 탈옥이다.
-미셸 푸코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넌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인데……
-제이슨 본(맷 데이먼), 『본 아이덴티티』 중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가족, 국적, 모국어, 학력, 직업, 재산……. 이런 것들 중에 나의 나다움을 진정으로 결정하는 요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이용하는’ 세력들은 넘쳐난다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는가 하면, 각종 스팸메일과 스팸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남의 번호를 알았는지 천연덕스레 ‘지인’ 행세를 한다. 아직 우리의 온몸에 바코드가 새겨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개인의 정보를 유출시킬 빌미를 이 세상에 너무 많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현금인출카드, 운전면허증. 이러한 극히 일상화된 ‘신분 증명’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버젓이 노출하는 절호의 미끼가 된다.
미셸 푸코는 현대인이 정체성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회의 규율 권력을 탐구했다. 말하자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계보학적인 탐구, 나아가 나를 진정한 나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과의 전투가 그의 학문적 실천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인간 주체가 ‘자기 자신’을 합리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를 비롯한 서구적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다. 이성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출발했다. 자기 자신을 이성의 힘으로 인식 가능하다는 확신이 서구적 근대의 기원이기도 했다. 미셸 푸코는 바로 이 근대성의 탄생 지점을 공략하여 그 확실성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떤 형태의 합리성과 역사적 조건을 통해서 인간 주체는 그 자신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주체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 주체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푸코, 『텔로스』에서의 인터뷰 중에서
주체는 과연 어떤 대가를 치르고 주체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뼈아픈 질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 중 하나가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시리즈이다. 일명 ‘본 시리즈’라고도 불리는 이 역작은 주인공이 ‘내가 누구였는가(Who Was I)?’를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상 최대의 추격전을 벌이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에게 덧입혀진 정체성, 자신의 기억에도 없지만 자신을 규정하는 강요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주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간신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단지 뜨거운 연민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갇혀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삶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들이 저토록 간단히 말소될 수 있는 것이라면(기억상실증), 나를 나이게 만드는 정체성을 저토록 간단히 위조할 수 있는 것이라면(한 사람을 잔혹한 인간병기로 만드는 CIA처럼), 우리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살아가는 ‘나’라는 경계는 얼마나 대책 없이 허약한 것인가.
그 허약한 정체성의 표지들을 한 톨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토록 하루하루 굴욕을 참아야 하는 것인가. 아직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한 사내는 낯선 바다 위를 표류하며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게다가 나를 죽이려 하는 자들을 통해서만 나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다니. 이 끔찍한 역설을 우리의 ‘이름 없는 사내’는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