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호
다시 시작된 7월 13일. 마코토는 그토록 좋아라 하던 늦잠도 팽개치고 일찍 일어나 부리나케 학교에 나가며 가족과 친구들을 놀래게 만들고, 가정 시간에 했던 실수도 ‘다른 남학생’에게 떠넘기고, 쪽지 시험도 무진장 잘 보며, 평소처럼 야구를 하지 않고 노래방에 가서 절친 치아키와 고스케에게 10시간도 넘는 ‘노래방 런닝타임’을 선사해준다. 온 힘을 다해 전력 질주하거나 온몸을 던져 곳곳에 충돌하는 행위를 통해 그녀는 타임 리프의 노하우를 체득하게 된다. 타임 리프 능력으로 그녀가 고안해낸 가장 ‘즐거운 일’들은 이렇게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을 바꿔치기하는, 거창한 시 간여행이 아닌 자잘한 시간의 소꿉놀이다.
이모를 만나 타임 리프의 이점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마코토의 표정은 도저히 어제, 아니 오늘 죽을 뻔한 사람이 겪었을 법한 천신만고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우에노박물관에서 일하는 이모에게 케이크를 선물하자 이모는 너무 무리한 거 아니냐며 미소 짓는다. “용돈을 다 써도 다시 용돈 받는 날로 돌아가면 되는걸! 그럼 용돈이 다시 원래대로란 말씀! 이젠 시간을 왔다 갔다 내 맘대로! 마음 놓고 늦잠 잘 수 있고 물건을 잃어버려도 찾으러 갈 필요 없고 뷔페도 90분 이상 먹을 수 있어! 맞아, 드라마 놓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내가 녹화해 둘게.” 이모는 귀여운 조카에 대한 애정과 철없는 조카에 대한 걱정이 동시에 서린 복잡한 얼굴로 말한다. “다행이네. 별 거 아닌 일에만 타임 리프 능력을 쓰는 듯해서.” 타임 리프 놀이 때문에 매일매일 너무 즐거워서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는 마코토를 보며 이모는 질문한다. “네가 이득을 본 만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천방지축 마코토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짓는다. “어? 그럴까? 글쎄? 에이, 설마 없겠지. 있어도 상관없어.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 얼마든 되돌릴 수 있으니!”
마코토는 아, 혹시 ‘내 시간이니까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정말 ‘내 시간’이란 있는 걸까.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시간을 연출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지만 조작하면 조작할수록 그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내가 ‘내 시간’이라 생각했던 것이 실은 ‘타인의 시간’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 1분 1초도 완전히 ‘나에게만 귀속된 시간’이 없다는 것을 마코토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짱 신나는’ 타임 리프를 통해 깨닫게 된다. 타자의 시간이 없다면 자아의 시간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시간을 감각하는 것은 ‘시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들과의 얽힘,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사건’을 통해서라는 것을. 그리하여 시간의 단위는 시, 분, 초가 아니라 너와 나의 우정이 탄생하는 사건, 그와 그녀의 사랑이 발효되고 숙성되는 사건, 당신들과 우리들의 인연이 얽혀드는 그 모든 ‘사건’을 통해 정의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그녀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한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시계’로는 똑같이 측정되는 시간을 반복하면서 ‘감각’으로는 전혀 다른 시간을 감촉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녀가 시간을 위한 불굴의 뜀박질을 계속할수록 시간은 그녀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의에서 멀어지고, 그녀는 매번 달라지는 시간의 변덕스런 얼굴을 낱낱이 관찰하게 된다. 그녀는 시간을 ‘놀이터’ 혹은 ‘장난감’으로만 생각했던 자신의 발상이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닐까 고민한다. 시간은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기호’가 아닐까. 알 수 없는 상형문자처럼 우리 앞에 주어진 시간은 어떤 해석의 현미경을, 어떤 창조의 손길을, 어떤 실천의 몸짓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그러나 마주친 것, 즉 사유의 재료의 필연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분명히 기호와의 그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사유활동은 단지 자연스러운 가능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유활동은 단 하나의 진정한 창조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의 사유 활동의 발생이다. 그런데 이 발생은 사유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것, 처음의 혼미한 상태, 즉 단지 추상적일 뿐인 가능성들로부터 사유를 벗어나게 하는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유함이란 언제나 해석함이다. 다시 말해 한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하고 해독하고 전개시키는 것이 순수한 창조의 형식이다. (……) 우리는 강요당해서, 시간 안에서만 진실을 찾는다. 진실을 찾는 자는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의 기호를 알아채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 한 천재가 다른 천재를 부르듯 예술 작품이 그에게 창조하도록 강요하는 기호들을 방출하는 한, 그는 독자이며 청자이다. (……) 언제나 창조는 사유활동의 생성과 마찬가지로 기호에서 출발한다. 예술작품이 기호들을 탄생시키는 만큼 도한 예술 작품은 기호에서 태어난다. 질투에 빠진 남자와 마찬가지로 창조자는 기호를 감시하는 신성한 해석자이며 진실은 그 기호에서 누설된다.
-질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145~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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