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헛되이 보내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질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7쪽.
고층빌딩이 조각조각 찢어버려 토막 난 하늘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 속의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이 한없이 낯설다. 우리가 저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가. 하늘뿐만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교정으로 보이는 공간 구석구석이 문득 고풍스러운 유물처럼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칠판에 적힌 글씨에 드리운 석양의 그림자조차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듯 느닷없는 애수를 자아낸다. 인물의 액션과 대사가 그려내는 눈부신 역동성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은 ‘학원물’ 특유의 명랑함이 아니라 애잔한 정적으로 가득하다. 이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은 ‘분명한 현재’를 마치 오래전부터 그리워해오던 머나먼 옛날처럼 ‘노스탤지어의 시간’으로 역전시킨다.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찰나의 순간이 0.1초만 지나도 아득한 과거로 사라질 듯한 조바심. 관객은 마코토와 치아키와 고스케의 학창 시절을 보여주는 단 몇 개의 장면만으로 이미 ‘교복을 입고 건들거리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 관객이 마코토와 동년배라면 그녀와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이 생생한 현재가 왠지 문득 그리울 것이다. 관객이 마코토보다 더 어리다면 그는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미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분명 아득한 과거가 아닌 동시대의 현재를 그려내지만, 그 선명한 현재를 아련한 과거처럼 못 견디게 그립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덜렁이 소녀 마코토가 ‘머피의 법칙’에 제대로 걸려든 어느 날, 7월 13일. 특별한 걱정이나 엄청난 고민 없이 그럭저럭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마코토에게 정말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날이 찾아온다. 아침부터 그토록 자전거 페달을 밟았는데도 지각을 했으며, 아무런 준비도 안 했는데 갑자기 쪽지 시험을 보질 않나, 가정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해서 불을 낼 뻔하질 않나, 모르는 남자아이와 호되게 부딪쳐 우당탕탕 넘어지질 않나……. 그런데 바로 이날 마코토는 과학실에서 갑자기 넘어져 호두처럼 생긴 신기한 물체를 만나게 된다. 이 호두껍데기가 마코토의 뒤통수 아래서 깨지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같은 날 마코토는 칠판 위에 마치 계시처럼 박혀 있는 문장을 보게 된다. Time waits for no one. 이 문장을 바라보는 말괄량이 소녀 마코토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마코토는 친구 유리와 대화를 하며 문과에 갈지 이과에 갈지 고민한다. 아직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문과와 이과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바로 그 순간. 그토록 어린 나이에 운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했던, 그 당혹스런 시간 속으로 우리는 함께 빨려 들어간다. 우리의 뒤꽁무니를 맹렬히 추적하는 시간을 뒤로한 채, 우리는 어느새 이곳까지 흘러 왔다.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망설이고 주저하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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