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아의 그림자를 만나다
『원령공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숲의 수호신 시시신은 아마도 바슐라르적 몽상의 힘이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극단일 것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하던 원령공주의 숲에 밤이 깃드는 시간. 시시신이 거대한 몸집을 지닌 푸르고 투명한 데다라신의 모습으로 변해 아름다운 숲을 거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몽상의 세포가 깨어나는 시간. 대지와 휴식의 몽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물속에서 치유의 밤을 맞이하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 가까이로, 시시신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그의 발자국 위에 아름다운 꽃과 식물이 피어난다. 시시신이 아시타카의 상처를 천천히 핥아주자 사경을 헤매던 아시타카는 거짓말처럼 상처를 딛고 일어난다.
어느새 마술처럼 돋아난 새살에 아시타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재앙신의 저주’를 다시금 발견하고 절망한다. 시시신은 아시타카가 목숨을 걸고 원령공주를 구한 것은 ‘인정’하지만 부족을 지키기 위해 재앙신을 살해한 것은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아직 끝나지 않는 저주의 늪을, 깨어나자마자 인식해버린 아시타카. 그는 간신히 힘겨운 꿈에서 깨어나자 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듯 고통을 감추지 못한다.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아시타카에게 이번에는 원령공주가 먼저 다가온다. 원령공주는 자신의 입속에서 풀을 오물오물 씹어 아시타카의 입속에 넣어준다. 눈을 감은 아시타카는 할 수 없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도 밀려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한다.
다시 살아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살아남기 위해 작은 소녀의 입속을 빌어 음식을 삼켜야 한다는 사실이, 죽어도 삼키기 싫지만 삼켜야 하는 가혹한 운명처럼 곤혹스럽다. 아시타카를 살리기 위해 음식을 대신 씹어 입에 넣어주는 소녀의 모습에는 적대적인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따스한 치유의 모성이 살아 숨 쉰다. 아시타카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지겨워서, 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의 짐짝이 너무 무거워서, 그렇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낯선 사람에게 풀까지 씹어 먹이는 원령공주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원령공주와의 만남을 통해 아시타카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기에 미처 그 고통을 감지하지도 못했던, 무의식 속에서 등을 돌린 채 흐느끼는 또 다른 자아의 그림자와 만난 것이다.
자아는 원래 자기 방어를 하고 자기의 야망을 좇기 때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뭐든지 억압해야 한다. 이 억압된 요소가 그림자가 된다. (……) 그림자는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 먼저 자아의 어두운 측면이다. 평상시 이 부분은 깊숙이 잘 감춰져 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하기 전까지 자아는 이 존재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아 본위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내면 깊숙이 억압된 부분이다. 그것이 아무리 사악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이 부분은 근원적으로 자기(the Self)와 연결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혹은 자기the Self)은 자아보다 그림자를 선호하신다. 그림자는 아주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중심, 즉 진정한 우리 자신과 훨씬 가깝다.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64~65쪽.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