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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다이어리,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 7.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 7.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건방진방랑자 2021. 7. 28.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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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비행기의 발명은 곧 추락의 발명이다.

-폴 비릴리오, 미지수(Unknown Quantity), 2003, 24.

 

 

진보의 핵심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기차가 발명되어 교통 시스템이 일단 바뀌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나룻배의 낭만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기차로 정상적인 통행을 할 수 있을 때’, ‘여분의 쾌락을 찾아나서는 감정의 사치에 속한다. 기차의 속도에 일단 길들어지면, 처음에는 공포와 경탄의 대상이었던 기차도 어느새 당연한 습관이 된다. 기차보다 조금이라도 느린 운송수단은 어느새 퇴행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 움직이는 기술만이 끊임없이 발명된다. 아시타카는 문명 내부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문명의 무한 속도전에 제동을 거는 존재다. 아시타카의 존재는 이분법적으로 진보(문명)’야생(야만)’을 분류할 수만은 없는 모순적 상황을 암시한다.

 

 

 

 

아시타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원령공주 측은 물론 에보시 측도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에보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 받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선물한 것이다. 문제는 에보시(문명)의 힘이 너무 일방적이고 막강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대칭적 대립의 상황을 깨뜨리려면 그 상황에 균열을 내는 메신저가 필요하다. 아시타카가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위험천만한 메신저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양측 모두에게 첨예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보시 일족이 문명의 의식(합리주의)’를 상징한다면 원령공주와 모로 일족은 문명의 무의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무의식은 곧 자연그 자체다. 문명은 자연을 질료로 창안되었지만 스스로 자연에서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타자화했다. 이 타자화된 자아의 그림자가 바로 자연인 셈이다. 단지 문명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 단지 문명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는 아시타카는 몽상의 존재로서 문명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주는 메신저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에보시와 원령공주와 아시타카가 모두 공존한다. 문제는 에보시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원령공주와 아시타카, 즉 몽상과 환상의 세계를 가차 없이 배제해버려 이제는 그 흔적을 찾는 일조차 점점 어려워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슐라르는 밤의 무의식적인 환상과 낮의 의식적인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분석 전문가들조차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몽상을 사유의 중심에 올려놓는다. 상상력의 매트릭스는 바로 이 몽상의 에너지에서 탄생한다. 인간이 자신이 이룬 문명의 업적에 자만하지 않고(처음부터 자연이 없었다면 문명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 자주 망각한다), 대책 없이 웃자라버린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단지 인류의 시점으로 자연을 해부하고 재단하지 않는 태도는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몽상하는, 사유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몽상의 세계는 심리학자의 입장에서는 드라마틱함이 부족하고, 철학자나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논리성이 부족하다. 몽상은 길 잃은 의식이거나 결핍된 환상처럼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이야말로 인간의 사유가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새로운 진경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몽상은 깨어 있는 무의식이며 검열에서 자유로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산업시대에서 문명인으로 살면서, 우리는 물건들에 사로잡혀 있다. 물건 하나하나는 한 떼의 물건들의 대표자이다. 그런데 물건에 개체성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물건들의 머나먼 과거로 좀 가보자. 친숙한 물건 앞에서 우리의 몽상을 회복시켜 보자. 그리고는 조금 더 멀리,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물건이 제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나 알아보려 할 때 우리의 몽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만큼 그렇게 멀리 꿈꾸어보자. (……) 몽상은 대상을 성화(聖化)한다. 사랑받는 친숙한 대상에서 성스러운 개인적 대상에 이르는 사이는 백지 한 장이다. 곧 물건은 부적이 된다. 그것은 삶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해준다. (……) 정말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절제 없이 검열 없는 몽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지식에서부터가 아닌 것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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