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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 10. 상생과 적대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 10. 상생과 적대

건방진방랑자 2021. 7. 28.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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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생과 적대

 

 

한편 아시타카가 깨어나는 순간 거대한 멧돼지들의 무리가 원령공주와 모로를 방문한다. 에보시의 손아귀에 곧 파괴당할 위기에 놓인 시시신의 숲을 지키려고 왔다는 멧돼지들, 그 커다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옷코토누시. 원령공주의 엄마인 들개 모로. 모로는 낯선 인간 아시타카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옷코토누시에게 말한다. “시시신이 이 청년의 상처를 치료해줬어 그래서 안 죽이고 돌려보낸다.” 옷코토누시는 대경실색한다. “시시신이 인간을 구했다고? 인간은 살리면서 왜 나고신은 구해주지 않았나? 시시신은 숲의 수호신이지 않은가?”

 

 

 

 

재앙신이 되어 아시타카의 마을을 공격한 거대한 멧돼지가 바로 나고신이었던 것이다. 모로는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타이른다. “시시신은 생명을 구하기도 하지만 빼앗기도 하지. 나고신은 죽는 걸 두려워한 거다. 지금의 나처럼……. 내 몸에도 인간의 총알이 박혀있다. 나고신은 달아났지만, 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난 살만큼 살았다. 시시신은 내 목숨을 앗아갈 거다.” 삶뿐 아니라 죽음을 관장하는 일도 역시 생명의 신 시시신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삶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영역이기에. 모로는 인간이 쏜 총탄을 몸에 지닌 채 죽음을 껴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견뎌내면서, 시시신의 존재를 더욱 가슴 깊이 느끼는 법을 터득한 셈이다.

 

나고신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옷코토누시는 모로에게 분노하며 멧돼지부족의 몰락을 시시신과 모로의 탓으로 돌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순간, 아시타카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며 고통스럽게 고백한다. “나고신을 죽인 건 나야. 나고신이 마을을 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죽였지. 그는 커다란 멧돼지 신이었어. 이것이 증거야(그는 점점 무섭게 번져가는 팔뚝의 흉터를 보여준다). 시시신을 만나 저주를 풀려고 여기 왔어. 시시신은 에보시 부족이 입힌 총상은 치료해줬지만 나고신이 남긴 저주의 멍은 없애지 않았지. 나는 이제 이 저주의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죽어갈 거야.” 옷코토누시는 아시타카의 진솔한 고백에 분노를 잠재우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인간들에게 멧돼지 부족의 마지막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인간의 사냥감밖에 안 돼. 모두 함께 덤비면 인간들한테 전멸당할 거야. 우리 일족이 멸망한다 해도 인간에게 힘을 보여주고 말 테다.”

 

 

 

 

한편 에보시 부족이 제조해낸 엄청난 분량의 철을 탐내는 아사노 막부는 에보시로 하여금 철의 절반을 넘기라고 협박하고, ‘시시신의 목을 노리는 사냥꾼 무리들이 국왕의 명령이라는 명목으로 숲을 침범한다. 에보시는 숲을 파괴하며 제철소를 운영하여 시시신의 숲과도 적대하게 되고,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부를 축재함으로써 막부 세력과도 반목하게 된다. 에보시의 해법은 간단명료하다. 숲을 더욱 전면적으로 파괴하여 제철소의 자원을 확보하고 더 강한 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철을 만들면 숲은 점점 약해질 것이다. 그럼 인명피해도 줄일 수 있어.”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정복했듯이 시시신의 숲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숲을 적대적 자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땅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주적 몽상의 여백을 잃어버린 인간이다. 게다가 사냥꾼들은 시시신의 목을 잘라 오면 불로불사(不老不死)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국왕의 왕명을 받아, 시시신의 목을 베기 위해 숲속에서 잠복 중이다. 그들 또한 시시신의 목을 소유함으로써 숲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흡수시키려 하는 셈이다. 이렇듯 소유의 집념, 스톡(stock)욕망은 인간의 창조적 몽상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 아닐까. 이제 숲을 소유하려는 에보시와 시시신의 목을 요구하는 국왕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고 숲을 지키려는 멧돼지들과 모로 일족의 결사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변증법은 심층의 리듬에 따라 펼쳐진다. 그것은 덜 깊은 곳에서, 언제나 덜 깊은 곳(남성)에서, 언제나 깊은 곳, 언제나 더 깊은 곳(여성)으로 간다. 우리가 아주 풍요롭게 펼쳐진, 단순한 고요함 속에서 휴식하는 여성을 발견하는 것은 몽상, 앙리 보스꼬가 말하는, ‘숨어 있는 삶의 한없는 저장소 속에서이다. 날이 새면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내적 존재의 시계는 남성으로-남자건 여자건 모든 사람에게 남성으로-종을 친다. 그러면 사회적 활동의 시간,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활동의 시간이 되돌아온다. 감정적인 삶에서까지도, 남자나 여자는 저마다 자신의 이중의 힘을 이용할 줄 알고 있다. (……) 몽상가에게 조용한 고독을 되돌려주는 몽상 속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인간은 몽상의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언제나 내려가면서, 심층의 아니마 속에서 휴식을 발견한다. 추락이 없는 하강이다. 이 불확실한 심층에서는 여성적인 휴식이 지배한다. 이 여성적 휴식 속에서, 염려, 야심, 계획에서 떨어져, 우리는 구체적인 휴식, 우리의 전 존재를 쉬게 하는 휴식을 알아본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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