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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 9.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 9.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건방진방랑자 2021. 7. 28.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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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Make thy love larger to enlarge my worth)!

-엘리자벳 브라우닝

 

몽상가의 몽상은 전 우주를 꿈꾸게 할 수 있다. 몽상가의 휴식은 물, 구름, 미풍을 쉬게 할 수 있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6~77.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그 자체로 충족되는 우리 속의 본성이다. 그것은 조용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깊은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의 존재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82~83.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간.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 위에서 서성이던 그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모든 일이 일어난 듯한, 치유와 몽상의 시간이었다. 아시타카를 치유한 세 가지 힘은 원령공주의 보살핌과 물의 치유력, 그리고 시시신의 치료(아시타카의 상처를 직접 핥아주던)였다. 아시타카는 자신을 이끌어오던 모든 존재의 중력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지는 휴식, 즉 여성적 휴식 속에서 부족을 잊고 운명을 잊고 저주를 잊는다. 걱정, 야심, 계획 등의 모든 아니무스(animus,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적 고통을 떠나서 고요, 휴식, 치유, 돌봄의 세계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연대기적 시간에서 도피함으로써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는 부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고민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우주적 몽상으로 한껏 비약한다. 그는 시계적 시간에서 벗어남으로써 통과의례의 가장 고통스러운 문턱을 통과하게 되고, 비로소 나 아닌 나와의 우주론적 만남을 시도한다. 원령공주의 세계는 아시타카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아니마(anima,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 억압된 아니마의 존재가 아닐까. 바슐라르는 몽상의 시학에서 우주적 몽상이란 인간이 자기 안에 잠자는 아니마와 만나는 극적 체험이라고 했다. 이 순간 가스통 바슐라르는 칼 구스타프 융과 만나 철학의 연금술을 시도한다.

 

 

 

 

몽상가에게 지독한 혜택을 주는 몽상 속의 상상세계는 자기 아니마를 위해 이루어진다. 아니마는 언제나 단순하고 조용하고 계속적인 삶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융은 나는 아니마를 단순히 삶의 원형이라고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지식을 찾지 아니하고 삶, 단순한 삶을 꿈꾸는 사람은 여성성으로 기운다. 아니마 주위로 집중하면서, 몽상은 몽상가가 휴식을 발견하는 것을 도와준다. 가장 좋은 우리의 몽상은, 남자건 여자건, 우리 저마다의 속에 있는 우리의 여성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게 여성성의 흔적을 갖고 있다. 우리 속에 여성적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쉴 수 있을까?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08.

 

 

파괴하고 정복하고 소유하여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에보시가 아니무스의 힘을 상징한다면, 고요한 치유와 조건 없는 보살핌, 휴식과 안정을 꿈꾸게 하는 시시신은 아니마의 힘을 상징한다. 아시타카를 간호하는 동안만은 전사의 가면을 벗고 타인의 고통에 몰두하는 원령공주의 모습 또한 아니마의 저력을 보여준다. 아니마는 결코 나약한 여성성이나 남성에게 결핍된 여성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여성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자발적 연마와 성숙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본원적인 여성성이다. 시시신의 존재 방식은 아니마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를 치료하기 위해 시시신이 나타나는 순간. 그곳에는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구획도 사라지는 듯 신비로운 아우라가 감돈다. 시시신의 발자국이 머무는 곳마다 이름 모를 꽃들과 싱그러운 풀들이 솟아오르고 한없이 평화로운 정적의 기운이 감돈다.

 

인류가 주인의 위치에 머무는 한, 인류의 1인칭 시점으로 우주가 관찰되는 한, 우리는 보호라는 미명하에 자연을 재단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 못하는 동물과 식물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원령공주는 동물들이나 식물들과 대화를 하는 데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언어 없이도 대화할 수 있는 원령공주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간극을 매개하는 몽상의 귀재, 샤먼의 모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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