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0. 일곱가지 감정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 그것을 일컬어 중(中)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마디에 들어맞는 것 그것을 일컬어 화(和)라고 한다. 喜怒哀樂, 情也. 其未發, 則性也. 無所偏倚, 故謂之中. 發皆中節, 情之正也, 無所乖戾, 故謂之和. 희노애락은 정(情)이다. 발동되지 않은 것은 성(性)이다. 치우쳐지고 기울어지는 것이 없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동되어 다 절도에 맞으니, 정(情)의 바름으로 어그러짐이 없는 것을 ‘화(和)’라 한다. |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여기에 한의과 대학생들이 꽤 있습니다만 한의과 대학에서 매일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병인에는 내인(內因)ㆍ외인(外因)ㆍ불내외인(不內外因)의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죠. 외인이라는 것은 외사(外邪)를 말합니다. 감기 같은 것을 외사(外邪)라고 봐요. 풍(風)·한(寒)·서(暑)·습(濕)·조(燥)·화(火) 같은 것[六氣]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불내외인(不內外因)’이라는 개념이 영 머릿속에 안 들어옵니다. ‘불내외인’은 ‘내인’도 아니고 ‘외인’도 아니라는 것인데 한의학에서 말하는 이런 개념들이 좀 막연한 데가 있어요. 음식상(飮食傷)ㆍ노권상(勞倦傷)ㆍ외상(外傷)이 모두 이 불인불내 개념에 들어가 있어요.
내인 즉 칠정상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조선조의 가장 유명한 논쟁이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인데, 여기서의 칠정(七情)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입니다.
허나 한의학에서 말하는 칠정(七情)은 희(喜)·노(怒)·우(憂)·사(思)·비(悲)·공(恐)·경(驚)으로 모두들 『皇帝內經』에서 나온 말로 알고들 있습니다. 이 칠정(七情)에 관한 논란이 아주 복잡한데 이게 참으로 웃기는 얘기입니다. 한의학책들을 보면 예외 없이 희(喜)·노(怒)·우(憂)·사(思)·비(悲)·공(恐)·경(驚)이 『내경』에서 온 것 인 줄로 알고 칠정(七情)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지난번에 『내경』에 나오는 7정에 관해 레포트를 쓰라고 해서, 책을 뒤져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수많은 한의학계의 인재들이 그것 하나를 발견 못했을까, 아이고 두(頭)야! 칠정(七情)이나 희(喜)·노(怒)·우(憂)·사(思)·비(悲)·공(恐)·경(驚)이라는 말이 『내경』에는 없어요.
그런데도 장기(臟器)적으로 희(喜)는 어떻고, 노(怒)는 어떻고, 공(恐)할 때는 무슨 약을 쓰고, 경(驚)할 때는 무슨 약을 쓴다는 등등 주를 달기까지 합니다. 문헌을 얼마나 안 보는 무지막지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喜)·노(怒)·우(憂)·사(思)·비(悲)·공(恐)·경(驚)이라는 말은 한의학에서 문헌적 족보가 없는 말입니다. 이것의 출전은, 아직 내가 정확히 확인은 못했지만 상당히 후대(아마 唐이후)에 형성된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한의학의 문헌을 모르는 무식한 날도둑놈 같은 놈들이 떠드는 말이예요.
그리고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데 좀 웃기지 않습니까? 欲이라는 것도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기에는 좀 이상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제마라는 사람이 위대한 점이 인간의 감정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이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용(中庸)』을 얘기할 때 칠정(七情)을 얘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단칠정론이라는 말도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칠정론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하등의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칠쟁(四七論爭)에서는 정(情) 전체를 논할 뿐이지 칠정(七情)의 조목을 따져서 논쟁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실제적으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밖에 없는 것이죠. 동양문헌에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감정의 형태를 가장 확실하게 묘사한 말은 이 『중용(中庸)』 제1장의 희노애락(喜怒哀樂)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여러분들이 명확하게 인식해 주기 바랍니다. 이제마의 위대한 점은 그렇게 많은 학자와 한의사들이 칠정(七情)을 말해도 그 말에 속지 않고 중용(中庸)에 고집(固執)해서 희노애락(喜怒哀樂)만을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마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희노(哀怒)·애락(喜樂)으로 배열을 했습니다.
哀 | 슬픔(sad) | 肺 | 天 |
怒 | 노여움(anger) | 脾 | |
喜 | 소화의 즐거움 | 肝 | 地 |
樂 | 번식의 즐거움 | 腎 |
인간의 감정상태를 나누려고 한다면 색깔을 수천가지로 나누듯 한이 없으나 인간의 감정을 한마디로 가르면 애노(哀怒)와 희락(喜樂)밖에 없습니다. 수천가지의 색깔을 단순화시키면 3원색(Primary Colors: Red, Green, Blue)으로 환원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단순할수록 아름다운 거예요. 애노(哀怒)라는 것은 Pessimistic sentiments(비극적 감정)이고, 희락(喜樂)이라는 것은 Optimistic sentiments(희극적 감정)입니다. 그러면 애(哀)와 노(怒)는 어떻게 다르고 희(喜)와 락(樂)은 어떻게 다른가가 문제입니다. 애노(哀怒)는 둘 다 슬픈 감정이라도 애(哀)는 슬픈(sad) 것이고 노(怒)는 노여운(anger) 것입니다. 그러나 희(喜)와 락(樂)은 조금 애매합니다. 기쁜 것과 즐거운 것이 어떻게 다르죠? 이제마는 재미있게도 애·노·희·락을 폐(肺)·비(脾)·간(肝)·신(腎)에다가 배속시켰습니다. ‘천지론’으로 해석하면 애노(哀怒)는 하늘의 감정이고 희락(喜樂)은 땅의 감정입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땅에서 난 것을 우리가 먹어서 다시 땅으로 돌리는 작업인데 그것이 즐겁다는 거예요. 또 하나의 대표적인 땅의 즐거움(earthly pleasure)은 Sex입니다. 땅에서 나의 개체를 번식시키는 행위인 섹스란 놈은 즐거운 것입니다. 성교하는 순간에 큰 고통을 느낀다면 모든 생물은 번식을 안 하겠죠. 그런데 묘하게 거기다가 기발한 감각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위대한 쾌락이죠. 아무리 스필버그가 영화로 쾌락을 많이 준다고 해도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그 순간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여러분들도 생각하죠? 네? 네? (웃음) 이제마에 있어서 락(樂)이라는 것은 분명히 Sexual pleasure를 말하는 것이며 희(喜)는 주로 소화기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제마에 있어서 신(腎)은 락(樂)과 상응되며 생식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간(肝)은 희(喜)와 상응되며 소화하는 것 즉 흡취지기(吸取之氣)와 관련 있습니다.
하늘의 감정은 대개 슬픈 거예요. 멀리 떠나가 있는 님을 그리워한다든가, 나와 관련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데에서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 나의 인생을 헌신해야겠다는 성직자의 생활도 하늘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은 슬프죠. 땅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은 대개 똥배 나오고 기쁜 사람들입니다.(齋生大笑)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에 음양론적인 구조가 들어가 있나 없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천지론적 감정으로 말한다면 이제마는 상당히 기발하게 분류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중용(中庸)』에 이미 천지 코스몰로지가 들어왔다고 한다면 내가 앞서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에는 이제마적 함의가 분명히 내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헌의 오리지날한 성격을 모르는 사람들이 칠정(七情)이 어떻고 구정(九情)이 어떻고 십정(十情)·백정(百情)으로 나누고 거기에 처방을 때리고 지랄들을 하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는 짓들입니다. 더구나 그런 의미 없는 것을 다 암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도저히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외우는 것이 한의과 대학 6년 동안의 생활이라면 좀 문제가 있겠죠. 한의과 대학에 적성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은 생각 없이 단순한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한의대 6년을 아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식이 있는 사람에게 한의과 대학생활이라는 것은 엄청난 고문의 세월입니다. 그 고문을 견디다 못해서 결국 뛰쳐나간 우리 황대길 군과 같은 사람이 있어요. 나는 황대길씨를 참으로 존경합니다. 우리 시대의 유일한 양심 같아요. 그런데 나는 1년이면 끝나니까 마지막까지 참자하고 견디고 있습니다.
미발(未發)의 미(未)는 ‘아직이라는 말’인데 시간적 순서(time sequence)를 전제로 해서 한 말입니다. ‘지위(之謂)’가 아니고 ‘위지중(謂之中)’이라고 했죠? 여기서의 지(之)는 분명히 ‘희노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이라는 말을 받는 명확한 지시대명사입니다. “그것을 일컬어서 중(中)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장 생각하기 쉬운 중의 개념은 ‘적자지심(赤子之心)’같은 것입니다. ‘적자지심(赤子之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적자(赤子)’에 대한 문제도 이 중(中)과 관련되어 유교에서 계속 논쟁이 되어온 것입니다. 중(中)이라는 개념을 무엇과 무엇의 밸런스(Balance)로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중(中)의 개념은 발현되기 이전의 어떠한 것을 뜻합니다. 중(中)이라는 것을 우주의 본체로 말해도 좋고 더 어마어마한 무엇으로 말해도 좋으나 성(性)·도(道)·교(敎)의 문제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유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性)·도(道)·교(敎)가 궁극적으로 희·노·애·락이라는 인간의 감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도를 얘기하는데 왜 갑자기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나왔는가? 결국은 유교문명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기독교가 말하는 하늘나라에 가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뉴톤처럼 과학적 법칙을 완벽히 알아서 이 세계에서 잘 써먹자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어떻게 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인간을 만드느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敎)의 핵심이죠. 『중용(中庸)』 제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 스스로 그러함은 물론 인간 문명의 모든 문제는 결국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과불급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의 문제도 생각해 보세요. 독재가 왜 문제가 됩니까? 한마디로 전두환이가 욕심내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겠어요? 그 엄청난 학살이 저질러진 동기가 뭐냐 이거요. 자기가 정권 잡아서 대통령 한번 해먹고 싶으니깐 그런 거잖아요! 인간세의 행동양식은 이와 같이 알고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야, 동양사상은 너무 시시한 사상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근세 서양이론에는 20세기에나 와서야 이런 모티비즘(Emotivism, 도덕 정서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동양사상은 인간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신의 문제도 아니고 진리의 문제도 아니고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오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문제라는 것을 항상 말합니다. 중(中)이라는 것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현되기 이전의 가능성(Potentiality)으로서의 중(中)이고, 미발(未發)이라는 것은 시간선상에서의 ‘아직’을 말합니다. 그런데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이미 발했을 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은 반드시 문명의 장을 갖기 때문입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동물의 세계에도 있는 것인데, 동물의 왕국 같은 영화들을 보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얼마나 명백한지 알 수 있어요. 여러분이 키우는 개를 보면 으르렁거릴 때와 좋다고 꼬리를 살랑거리는 때의 구별이 아주 명백하죠? 그러나 개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불급이 없기 때문이죠. 개가 자기 짝이 없어졌다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겠습니까? 연애편지를 쓰겠습니까? 그러니 상사병에 걸리거나 암에 걸려 죽는 일은 없지요. 개는 ‘스스로 그러한’ 범위 내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은 문명의 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발현될 때에는 반드시 그 문명의 주어진 상황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죠. 중절(中節)의 중(中)은 성조(聲調)가 제1성 평성(平聲)이 아니고 제4성 거성(去聲)입니다. 화살이 과녁에 들어맞는다[的中]고 할 때의 중(中)과 같은 뜻입니다. 또한 여기서의 절(節)은 문명의 상황(Situation of civilization)을 뜻해요. 장례식에 가서 깔깔대고 웃으면 되겠습니까? 감정이 발현되는 게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다 달라야 합니다. 슬프지 않으면 슬픈 척이라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사람들은 현명하게도 곡(哭)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편하게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어이, 어이’하고 울면 됩니다. 그러면 아주 슬픈 사람도 곡을 하는 동안에 너무 슬퍼서 몸을 해치는 일이 없게 되고, 슬프지 않은 사람은 남보기에 흉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다 『중용(中庸)』의 원리에 의해서 짜여진 동양인의 풍습입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중(中)이지만, 발현되었다 하면 그 상황에 맞아야죠. 왜냐하면 인간존재는 이미 문명 속에 들어와 있고 성(性)부터 교(敎)까지 연결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 맞는 게 바로 화(和)라는 것입니다.
‘위지화(謂之和)’ 중(中)은 서양철학으로 말하면 본체론이고 화(和)는 현상론입니다. 중(中)은 실체를 말하고 화(和)는 기능적 측면을 말해요. 그 기능들이 어떻게 조화되느냐 하는 문제죠. 중(中)와 화(和)는 분명히 서로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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