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2. 서도(書道)와 심미적 감수성
지난 시간에 17장까지 했죠? 오늘은 진도를 나가기 전에 여러분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기예를 하나 가르쳐 주겠어요. 현대 생활의 근본적 문제 중의 하나가 취미다운 취미가 없다는 점인데, 사실 컴퓨터 게임을 해본들 금방 식상해지고, 디즈니랜드를 가본들 몇 번 못가 시시해집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가슴 뿌듯하게시리 놀꺼리가 없어요. 그러니 학생들이 방황을 하고, 쓸데없이 술이나 마시러 다니는데, 우리 도올서원 학생들은 최소한 붓 잡는 법 정도는 알아야겠어요. 저번에 작시(作詩)를 가르쳐 줬죠? 시(詩)를 알았으니, 이제 서도(書道)를 배워봅시다.
칼리그라피는 모든 문자문명에 존재
‘칼리그라피(Calligraphy)’라 하면 중국문명에만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 문자가 있는 문명치고 칼리그라피가 없는 문명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사원에 가면 꼬불꼬불한 이슬람 문자로 사원 벽을 온통 장식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게 모두 칼리그라피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으로, 칼리그라피는 털로 된 붓을 도구로 사용하는 아트(Art)만을 가리킨다는 생각이 있는데, 중국 문명 최초의 서도(書道)라 할 수 있는 갑골문은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칼로 새긴 것입니다. 갑골문을 들여다보면 칼로 새겨진 획 하나하나에서 매우 강력한 파워를 느낄 수가 있어요. 『동경대전(東經大全)』이나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같은 목판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판본이란 나무판에 붓으로 글자를 써서 칼로 파낸 것으로, 구한말까지 가장 포퓰러한 인쇄 방식이었는데, 『동경대전(東經大全)』 ‘무자판(戊子版)’을 보면 서민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파냈는지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제 동양의 칼리그라피가 붓의 예술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겠죠?
심지어 볼펜도 훌륭한 칼리그라피 도구가 됩니다. 옛날에 내가 시골에 가서 서도(書道)의 대가라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양반이 어디서 볼펜을 하나 구해갖고 와서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 세상에 이렇게 간편하고 잘 써지는 게 있냐구! 그러면서 볼펜으로 글씨를 착착 쓰는데 완전히 붓글씨 쓰는 폼이지 뭐. 아무튼 우리가 공책에 볼펜으로 노트 필기하는 것도 훌륭한 서도(書道)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도(書道)는 붓·먹·벼루·종이로 이루어집니다.
붓, 팔의 연장
붓은 중국 문명의 가장 기발한 칼리그라피 도구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보편적인 칼리그라피 도구인 볼펜과 비교해보면 그 특성을 잘 알 수가 있죠.
우선 우리가 볼펜으로 노트 필기를 할 때는, 그것을 쥔 우리 손의 힘이 볼펜 대롱을 지나 맨 끝의 볼(Ball)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유지됩니다. 즉 우리 힘의 벡타(vector, 크기와 방향을 가지는 양)량이 가감없이 전달되어 노트에 글씨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서도(書道)는 행동반경이 매우 작습니다. 새끼손가락에서 팔꿈치에 이르는 선이 책상 위에 딱 붙어 있고 볼펜은 거기에 기대있는 형상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이 볼펜 서도(書道)는 그 행동반경이 작은 대신에 필기의 안정성을 획득하는 겁니다. 그러니 쉽게 배울 수가 있어서 결국은 현대의 가장 보편적인 서도(書道) 형식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붓을 사용하는 서도(書道)는 그 자세부터 다릅니다. 붓대롱의 윗부분을 엄지와 검지, 중지로 잡고 팔꿈치를 드는데, 이렇게 하면 엄청나게 넓은 행동반경이 가능해져서, 볼펜의 행동반경이 5 센티미터 정도라면, 붓은 1 미터 이상을 종횡무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밀한 글씨부터 커다란 글씨까지 모두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서도(書道)의 문제는 붓을 쓸 때 붓대롱까지는 나의 기(氣)가 그대로 전달되지만, 그 아래의 털 부분에서는 그것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대롱을 타고 쭉 내려간 나의 기(氣)가 털 부분에서 미묘하게 분산되는데, 바로 여기에서 붓을 사용하는 칼리그라피 아트의 절묘함이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붓글씨가 볼펜 글씨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유자재로 변하는 글자의 두께입니다. 심지어 하나의 글자 내에서도 그 변화가 참으로 다양한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처음에는 붓의 맨 끝 부분부터 종이와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글씨가 진행됨에 따라 뾰족했던 붓 끝에 기가 점차 백이면 백 가닥, 천이면 천 가닥으로 흐트러지고 붓이 그어대는 획의 굵고 힘차게 나아가다가 클라이막스를 지나서는 붓끝이 다시 가늘어져서 마침내 글자를 마무리할 때의 붓 끝의 모습은 원래의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붓은 반드시 꼿꼿하게 수직으로 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운필(運筆)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글씨의 진행을 위해, 또는 두껍게 쓰기 위해 붓을 옆으로 눕히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두껍게 쓰고자 할 때는 다만 붓을 위에서 아래로 눌러 주기만하면 되고, 이 상태대로 붓을 쥔 팔을 좌우로 움직여 주면 굵은 선이 나오는 것입니다. 붓은 상하 운동, 팔은 좌우 운동, 그리고 한 획을 시작할 때와 끝낼 때가 똑같이 붓끝이 뾰족하고 단정한 원래의 모습일 것. 이것이 바로 ‘중봉(中峰)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만 파악하면 되지, 서관(書館)에서 가르치는 ‘영자팔법(永字八法)’이니 뭐니 하는 복잡한 것들에 매달리는 것은 이런 원리적 파악을 아주 적극적으로 방해해 버린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사실 이 ‘중봉(中峰)의 원리’만 제대로 터득해 버리면, 무슨 필법, 누구누구 체(體) 하는 것은 깨끗하게 망각해 버릴수록 좋은 거예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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