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인의 창조(創造)
소음인의 탈심(奪心)과 식견(識見)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잘 아는 소음인에게 보였더니, “그렇다면 소음인은 창조력이 없다는 건가? 수학이나 과학같이 논리를 따지는 분야에서는 소음인이 최초로 밝힌 부분도 상당히 많을 것 같은데”라는 반론을 받았다. 그럴 것이다. 아주 새로운 영역을 소음인이 개척한 경우도 찾아보면 꽤 있을 것이다. 또 굳이 논리가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소음인이 새롭게 연 분야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어느 조각가가 한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나무 속에 형상이 숨어 있다고 느낀다. 나는 내가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 나무 속에 숨겨져 있는 형상을 정확하게 드러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인간이 창조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찾아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극단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창조라고 볼 수도 있다. 나와 똑같은 인간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내가 태어난 것부터가 창조다. 내가 하는 동작 하나하나, 내가 쓰는 글 하나하나가 다 새로운 창작이다. 뒤샹이라는 예술가는 공장에서 만든 양변기를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전시회에 내기도 했다.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창작이라는 것이다.
인간 행위의 어떤 결과를 발견이라고 볼 것인가, 정리라고 볼 것인가, 창조라고 볼 것인가는 정확하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까지를 표절이라고 볼 것인가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한 인간이 무엇을 창조했다는 것은 결과의 문제이고, 세상 사람의 평가의 문제다. 그러나 필자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행위자의 마음의 문제다.
소음인은 무엇을 창조한다고 생각하면 둘 중의 하나로 가는 경우가 많다. 한쪽은 기준이 없다는 것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위축되는 쪽이다. 다른 한쪽은 천심에 빠져 제멋대로 기준을 세우는 쪽이다. 둘 다 제대로 된 창조에 도달하기 힘들다. 기준은 이미 존재한다고 믿고, 나는 그것을 찾아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자세일 때 소음인의 장점이 가장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결과가 창조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의 결과라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켜나간 결과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창조한다는 생각 없이 했는데 사람들이 창조라고 부를 만한 것을 만들어냈다면, 그 사람은 가히 식견(識見)을 갖추었다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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