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탈심(奪心)과 식견(識見) / 소음인의 태양 기운
어떻게 식(識)을 얻을 것인가
소음인은 자신의 락성(樂性)으로 소음 기운이 필요한 일을 처리한다. 또 희정(喜情)으로 태음 기운이 필요한 일을 처리한다. 수양을 잘해서 경륜(經綸)의 경지에 도달하면 소양 기운이 필요한 일을 잘 처리할 것이고, 사심(邪心)에 빠져 긍심(矜心)이 강해지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마지막 남은 것이 태양 기운이 필요한 일이다. 이 부분, 즉 소음인의 독행(獨行)에 해당되는 부분을 동무(東武)는 식견(識見)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식견(識見)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태행(怠行)으로는 탈심(奪心)을 든다. 그러니까 ‘소음인의 머리에 탈심(奪心)이 없으면 대인(大人)의 식견(識見)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
식견(識見)이란 인식(認識)과 견해(見解)라는 뜻이다. 새로운 사실을 인식해서 자신의 견해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걸 다시 식(識)과 견(見)으로 갈라서 생각해보면 소음인이 약한 부분은 ‘식(識)’ 쪽이다. 소음인이 새로운 것을 인식하는 데 유난히 어려움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몇 번 나왔다. 그러나 인식된 것을 정리해서 견해로 만드는 일은 그럭저럭 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인식 능력을 어떻게 강화시키느냐, 소음인이 약한 직관의 부분, 주관의 부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태산에 올라보면 천하가 발밑에 깔린다. 자신이 인식한 부분보다 수준이 낮은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인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방법은 간단하다. 높이 올라가면 된다. 그런데 이게 간단하지 않다. 등반 기술, 특히 길을 찾는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에게 “높이 올라가봐, 그럼 어디가 길인지가 훤히 다 보여”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니까. 결국 소음인이 식견(識見)을 갖는 방법은 다른 사람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항상 같다. 자신이 잘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옳다. 소음인이 따라가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니까.
따라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대개 사람들이 따라가는 일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따라가는 것은 쉬워도, 옳게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길을 따라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부터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 길이 따라갈 만한지 아닌지를 옳게 판단해야 한다. 소음인의 사고 능력, 논리가 맞는지를 따져보는 능력이 이 과정에 도움을 준다. 또 옳은 길이라고 판단되어도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조금 가다가 망설이고, 다시 조금 가다 망설여서 결국은 처음 길을 연 사람이 갔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음인은 확실한 모순이 발견되지 않는 한 몰두하고 파고든다. 근본의 락성(樂性)이 발동하는 것이다.
종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소음인이 처음 종교를 제창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창시자의 뜻을 이해하고 그 경지에 도달해서, 이를 교리로 정리하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라면 어떨까? 비로소 하나의 종교가 완성되는 것이다. ‘대인의 식견(識見)’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들 만한 경우가 종교를 완성시킨 2대종사(二代宗師)분들의 모습이다. 종교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학문에 있어 하나의 학파를 완성시키는 일도 비슷하다. 그런 부분들을 소음인의 식견(識見)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항상 소음인은 2등밖에는 못할까? 그렇지는 않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분명히 남벽 사이에 올라갈 만한 크레바스가 있었어. 마지막 앵커 잡았던 곳에서 2시 방향 약간 위쪽으로 보였는데 체력이 도저히 안 돼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이런 경우에, 그 말을 믿고 올라가면 올라가는 것이다. 즉 최초 등반자는 될 수 없어도, 최초 등정자(登頂者)는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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