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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3부,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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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3부,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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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서부를 향해

 

 

정복이라고 하면 대개 국가적인 정책의 소산이다.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정복,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개척 등등 인류 역사에서 대표적인 정복 활동들은 모두 예외 없이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층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로마의 경우는 다르다. 로마의 정복 활동은 평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 국민적지지속에서 전개된다. 왜 그럴까? 리키니우스 법에서 보듯이 식민지를 획득해야만 평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에 영토 확장은 단순히 국력을 키우는 의미만이 아니라 생존과 존속을 위한 것이었다. 제국으로의 팽창은 모든 로마인에게 선택의 여지없는 필연적인 노선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영토 확장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에 로마의 식민시는 그리스의 식민시와 질적으로 달랐다. 그리스의 식민시들은 건설 주체들이 주로 경제적인 동기(무역)에서 스스로 모국인 그리스에서 나와 자발적으로 형성했다. 그러므로 모국의 정치적 간섭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물론 때로는 모국을 능가하는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의 식민시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건설되었으며, 영토 개척을 통해 과잉 인구를 이주시킨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강했다. 따라서 그리스 식민시처럼 경제적인 동기보다 전략적인 의미가 더 컸다. 그리스의 식민시들이 주로 항구에 집중된 데 비해 로마의 식민시들은 내륙에 많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그점을 보여주는 예다.

 

또한 그리스의 식민시들은 무역을 통한 경제적인 이해관계에서만 모국과 연관을 맺었으나 로마의 식민시들은 정치적ㆍ군사적으로 모국과 분리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는 새로 개척한 식민시들을 잇는 거대한 도로망을 구축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길이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아피아 가도다. 이 도로는 남쪽의 브룬디시움(지금의 브린디시)까지 연장되어 로마 영토의 등뼈를 이루었다. 또한 북쪽으로는 아리미눔(지금의 리미니)까지 플라미니우스 가도가 건설되었고, 이것이 다시 플라켄티아(지금의 피아첸차)로 연장되어 아이밀리우스 가도를 이루었다. 오늘날 이탈리아 도로망의 골간은 무려 2000여 년 전에 형성된 것이다. 도로의 주요 목적은 군대와 보급 물자의 수송에 있었으니, 여기서도 제국의 면모는 뚜렷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싹이 드러나기 시작한 로마 제국’ (정치 체제상으로는 아직 제국이 아니다)은 동양식 제국, 이를테면 비슷한 시기 중국의 한 제국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식민지와의 관계가 중국처럼 수직적인 구조를 취하지 않았다. 로마와 식민지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라티움 동맹의 정신을 따르고 있었다. 물론 로마의 리더십은 당연했고, 로마와의 친소 관계에 따라 대우의 차이는 있었으나, 모든 식민시에는 로마의 동맹시라는 동등한 자격과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이것이 곧 분할 통치(divide and rule)’라는 로마식(서양식) 제국의 원리인데, 이를테면 군사권과 외교권은 로마에 있고 식민시의 자치권은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로마의 고속도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이 아피아 가도 같은 로마의 도로다. 로마인들은 새로 개척한 도시와 거점들을 잇는 방대한 도로망을 건설해 장차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이 아피아 가도의 일부는 오늘날에도 도로로 사용되고 있으니 아주 실용적인 유적인 셈이다. 로마 시내를 관통하는 부분은 돌 벽돌을 수직으로 박아 넣어 특히 견고하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자 로마는 자연히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도 바깥의 지중해 세계의 사정은 로마가 반도 내에 머물 때와는 크게 달랐다. 반도를 통일할 때도 만만찮은 적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무주공산을 놓고 여러 세력이 다툰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중해는 이미 구획이 정해져 있었고, ‘임자가 있었다. 더구나 그 임자는 그 전까지 로마가 상대해온 적수와는 차원이 달랐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지중해 세계는 동부와 서부의 둘로 나뉘었는데, 마침 이탈리아 반도는 그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동쪽으로 갈까, 서쪽으로 갈까?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동부 지중해는 문명의 빛이 발원한 곳이자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이었고, 당시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이집트의 헬레니즘 3강이 지배하는 헬레니즘 세계였으므로 신출내기 로마가 언감생심 끼어들기는 어려웠다. 당연히 로마는 신흥 시장으로 떠오르는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곳에도 로마로서는 버거운 상대가 버티고 있었다. 바로 카르타고였다.

 

앞에서 본 것처럼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에 페니키아의 식민시로 출발했다. 하지만 당시의 식민시가 으레 그렇듯이 카르타고 역시 모국인 페니키아와 무관하게 발달했으며, 페니키아가 페르시아에 통합된 이후에는 그나마 모국마저 없어졌다. 그런 상태에서 카르타고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인 이점 덕분이었다. 동부 지중해의 많은 페니키아 식민시들은 일찌감치 페르시아나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에 정복되었으나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지금의 튀니스 부근)에 있었으므로 유럽과 아시아를 휩쓴 정복의 물결을 피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르타고에는 드넓은 미개척 시장이 있었다. 남들이 다 하는 일에 뛰어들면 잘해야 경쟁자들과 시장을 균분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면 시장 독점이 가능하다(물론 그만큼 위험도 크지만), 기원전 4세기 이후 헬레니즘 세계로 통합된 동부 지중해는 전통적인 무역 도시들로 이미 만원 사례였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서부 지중해 세계의 무역을 거의 독점했다. 특히 에스파냐(에스파냐란 원래 먼 나라라는 뜻으로 페니키아인들이 붙인 이름이었고, 로마 시대에는 히스파니아로 불렸다)는 날로 커지는 신흥 시장으로, 카르타고의 중요한 무역과 식민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와 코르시카, 사르데냐, 북아프리카 등의 서부 지중해 세계는 물론 멀리 아프리카 내륙의 콩고까지 진출했다.

 

그러는 동안 카르타고에 경쟁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남부 마그나그라이키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은 유력한 경쟁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역의 경쟁자일 뿐 정치적 위협 요소는 되지 못했다. 게다가 로마의 반도 통일로 그들의 활동이 크게 약화된 것도 카르타고에는 적잖은 이득이었다.

 

서부 지중해에서 카르타고의 유일한 경쟁자는 아직 로마에 정복되지 않은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시들뿐이었다. 하지만 시칠리아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은 카르타고만이 아니었다. 지중해 진출을 시도하는 로마 역시 시칠리아를 손아귀에 넣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가 시칠리아라는 돌멩이를 걷어차면 돌멩이는 곧장 카르타고를 맞히게 된다. 어차피 맞붙어야 할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결에 불을 댕긴 것은 바로 그 돌멩이, 시칠리아였다.

 

 

 예상 밖의 승리

 

 

기원전 264년 로마는 아직 지중해 진출을 꾀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반도의 통일을 이룬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은 데다, 상대는 이제까지 로마가 싸워온 반도 내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특히 카르타고 용병들의 명성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카르타고는 전통적으로 용병을 이용했는데, 에스파냐 출신의 보병과 누미디아 출신의 기병은 막강한 전투력과 용맹함을 갖추고 있었다(누미디아 기병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우수한 용병으로 성가가 높았다). 무엇보다 카르타고가 자랑하는 것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군 지휘관들과 오랫동안 해상무역으로 힘을 키워온 함대였다.

 

반도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로마는 카르타고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508년 로마는 카르타고와 우호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은 로마가 반도 바깥의 국가와 최초로 맺은 조약이었다. 이후로도 200여 년 동안 두 나라는 조약을 계속 갱신하면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가 반도 통일을 이루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 조약은 원래 로마가 지중해 서부 무역에 진출하지 않는 대신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정치적 사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야 문제가 없었지만, 통일을 이루고 더 큰 바다로 나가야 하는 로마로서는 더 이상 그 조약을 준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로부터 타전된 SOS는 로마 정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시칠리아의 메시나가 시라쿠사와 싸움이 벌어지자 로마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사실 로마가 반도를 통일하면서 시칠리아의 상황도 복잡해졌다. 시칠리아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로마와 카르타고 두 세력 간의 완충지이자 요충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시칠리아가 독자적으로 살아남아 발전하기는 어려운 형세였다. 따라서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전통의 카르타고에 붙을 것이냐, 신흥 세력인 로마에 붙을 것이냐를 두고 갈림길에 있었다. 시칠리아의 우두머리격인 시라쿠사는 카르타고를 택했는데, 이에 대해 로마의 장화바로 코앞에 있는 메시나는 불만이었다. 카르타고가 메시나를 공격하자 당연히 메시나의 용병들은 로마 측으로 붙었다.

 

메시나의 구조 요청에 자신이 없었던 로마 원로원은 망설였으나 민회는 과감히 전쟁을 결정해버렸다(역시 정복 국가 로마의 이미지는 평민들이 만든 것이다), 지중해의 패자를 결정하기 위한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기원전 146년 세 차례에 걸쳐 벌어졌는데, 사실상 별개의 전쟁들이다. 그러나 세 차례 모두 로마와 카르타고가 싸웠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중해의 패자를 놓고 벌어졌다는 점에서 성격은 같다. 포에니(Poeni, 라틴어로는 Puni)란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인을 부르는 이름인데, 페니키아에서 나온 말이다.

 

 

카르타고의 요새 포에니 전쟁의 시발점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중간에 있는 시칠리아에서 생겨났다. 사진은 시칠리아 서부에 있는 카르타고 요새의 유적이다. 1차전에서 카르타고군은 이곳을 거점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20여 년간 시칠리아를 무대로 전개된 1차전(기원전 264~기원전 241)에서 로마는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기원전 260년 시칠리아 북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로마가 승리한 것은 전혀 뜻밖의 성과였다. 강력한 해군 국가 카르타고를 해전에서 물리친 경험은 로마의 정복 전쟁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비록 4년 뒤에 로마는 카르타고 본토를 공략하다가 대패했지만, 이후 시칠리아에서 재개된 연장전에서는 골든골을 넣으면서 1차전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물론 당시에는 누구나 그것을 결승전으로 여겼고 1차전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로마의 전과는 막대한 배상금 이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었다. 하나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정복했다는 것이다(시라쿠사는 개전 초기에 로마 측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로마는 최초로 해외 속주(provincia)반도를 통일하기까지 로마는 반도 내의 도시들을 사실상 지배했으나 형식상으로는 동맹시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으로 해외 식민지가 생기게 되자 로마는 정책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속주 체제다. 사실 속주의 모델을 제공한 것은 카르타고였다. 시칠리아 서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는 지배 지역으로부터 정기적으로 공납을 받는 제도를 시행했다. 로마는 원래 이탈리아 동맹시들에서 군대를 지원받았을 뿐 공납을 받지는 않았다(경제적 관계보다 정치적 관계가 더 강했던 탓이다), 카르타고의 예를 좇아 로마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속주로 삼고 공납을 받기로 했다. 여기서 재미를 본 로마는 이후 해외 식민지들을 획득할 때마다 속주로 만들어 제국으로 향하는 경제적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속주를 뜻하는 프로빈키아라는 말에서 오늘날 영어의 province(지방)가 나왔고, 프랑스 남부의 고유한 명칭(프로방스)도 나왔다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시작된 속주 체제는 이후 로마의 기본적 식민지 경영 체제가 된다. 다른 하나는 해군과 함대를 육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해군력은 뒤이어 벌어지는 2차전(사실상의 결승전)에서 로마가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사실 1차전에서 로마가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카르타고의 내부에도 있었다. 로마의 본토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시칠리아에서 본국으로 급히 송환된 카르타고의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투력은 뛰어나지만 충성심은 아무래도 부족한 게 용병의 한계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전쟁에서는 졌다. 카르타고의 총사령관인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 기원전 270년경~기원전 228)는 그런 사태만 없었더라면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로마와 억지로 맺은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은 폐기되어야 한다. 조약을 폐기하려면 다시 전쟁을 벌이는 것밖에 없다. 하밀카르는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에스파냐를 쥐어짰다. 에스파냐는 카르타고의 거대한 시장이자, 광산들이 곳곳에 있는 부유한 속주이자, 질 좋은 용병들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다(그래서 에스파냐는 카르타고노바’, 즉 새로운 카르타고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때마침 로마는 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삼아 강력한 팽창정책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일부를 얻은 데 만족하지 않고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위기가 없지는 않았다. 기원전 225년에는 다시 150여 년 전처럼 갈리아인들이 대규모로 침입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로마가 아니었다. 막강한 로마 군단은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해 갈리아의 켈트 전사들을 북쪽 멀리 쫓아버리고, 그 일대에 여러 식민시를 건설했다. 이러한 로마의 팽창은 카르타고에 더욱 큰 위협이 되었다. 만약 로마군이 카르타고 최대의 식민지인 에스파냐 쪽으로 기수를 돌린다면? 당시 에스파냐의 총독이자 사실상의 왕이던 하밀카르는 카르타고의 생존을 위해 다시 칼을 뽑아들기로 결심했다. 2차 전의 전운이 무르익었다.

 

 

2차전의 시작 현재 에스파냐 북동부에 있는 사군툼의 유적이다. 사군툼은 로마의 주요한 식민지였는데,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이곳을 점령해 에스파냐 전 지역을 손에 넣었다. 이 사건에 대해 로마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다. 이 유적은 카르타고군에 의해 파괴된 도시를 후대에 로마인들이 재건한 것이다.

 

 

 영웅의 출현

 

 

하밀카르는 칼을 뽑아들었지만 무엇을 베지도, 도로 집어넣지도 못했다. 기원전 228년에 그만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의 사위인 하스드루발(Hasdrubal, ?~기원전 221)이 총독직을 이어받았으나 그도 몇 년 동안 에스파냐 경영에만 힘쓰다가 장인처럼 암살로 최후를 맞았다. 결국 하밀카르의 유지를 받든 것은 아들 한니발(Hannibal ,기원전 247~기원전 183년경)이었다.

 

한니발은 아버지와 매부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 정복 사업을 계속 전개하면서도 마음은 내내 콩밭에 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로마에 진 빚을 갚는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나온 손자병법』 「모공(謀攻)에서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가르쳤다. 로마의 전쟁 방식을 철저히 연구한 뒤 그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품고 서둘러 원정 계획을 수립했다.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로 가려면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한니발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담한 원정 계획을 구상했다. 육로로 로마를 침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탈리아까지 가는 길은 험준한 산악 지대인 데다 두 개의 큰 산맥(피레네와 알프스)을 넘어야 한다. 직선길인 해로를 놔두고 왜 그렇게 무모해 보이는 이동 경로를 택했을까?

 

거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로마의 해군력이 문제였다. 함대로 대군을 싣고 가려면 사르데냐 섬 부근에서 로마 해군과 해전으로 한판 붙지 않을 수 없는데, 1차전 이후 로마 해군이 크게 성장했으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둘째, 한니발이 고안한 비장의 카드를 쓰려면 육로를 택해야만 했다. 그 비장의 카드란 무엇일까? 그는 로마가 반도 통일을 이루기 직전 로마군을 괴롭힌 피로스의 코끼리 전술을 연구했다(188쪽 참조). 코끼리들이 제 역할을 했더라면 로마는 과연 피로스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한니발은 코끼리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그런데 코끼리들을 배에 태우고 항해를 하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덩치가 큰 코끼리를 배에 태우는 것도 문제지만 자칫 뱃멀미에 미쳐 날뛰기라도 한다면 난감한 상황이 될 것이었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알프스는 켈트어로 산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그림은 19세기 영국 화가 터너의 작품인데, 한니발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는 광경을 비장하게 묘사하고 있다(한가운데 지평선 부근에 조그맣게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한니발은 한여름에 알프스를 넘었지만 꼭대기는 만년설로 덮여 있으므로 이런 폭설을 겪었을 법하다. 터너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812년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를 침공한 시기다. 그는 한니발과 나폴레옹, 두 영웅의 운명을 하나로 본 것이다.

 

 

기원전 218년 봄, 한니발은 4만 명의 대군에 수십 마리의 코끼리까지 이끌고 역사적인 로마 원정에 나섰다. 피레네 산맥을 넘고 알프스를 앞에 두었을 때, 한니발은 미리 염두에 두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육로를 택한 데 따르는 또 하나의 이득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갈리아인들이었다. 몇 년 전 로마군에게 혼쭐이 나고 삶의 터전인 북이탈리아까지 빼앗긴 켈트 전사들은 한니발이 요구하지 않아도 기꺼이 용병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카르타고에는 또 하나의 뛰어난 용병 부대가 생긴 셈이었다.

 

비록 한여름의 등정이기는 했지만, 알프스를 넘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갈리아의 용병들이 충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이 북부 이탈리아에 들어왔을 때는 보병 2만 명에 기병 6000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 병력을 가지고 11개 군단 10만 명에 달하는 로마군을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불가능이라는 말이 없는 사전은 후대의 나폴레옹만 가진 게 아니었다. 한니발은 각지의 로마군을 무찌르며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로를 타고 2년에 걸쳐 남진한 끝에 기원전 216년 이탈리아 남부의 칸나이에 있는 로마의 병참기지를 격파했다. 이제 로마군도 더 이상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해 8월 양측은 칸나이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카르타고군의 병력은 5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지만, 이에 맞서는 로마군은 8만 명이었으니 중과부적의 상황은 여전했다. 그러나 한니발에게는 풍부한 전투 경험을 자랑하는 베테랑 용병들과 초승달 포진이라는 탁월한 전술이 있었다. 한니발은 전 군대를 초승달 모양으로 포진하고 양쪽 가장자리에 베테랑 부대와 기병들을 배치했다. 여전히 밀집대형을 장기로 하는 로마의 보병들이 가운데로 쳐들어오자 중앙의 카르타고군은 뒤로 물러나며 적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자연히 로마군은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이때 베테랑과 기병 부대가 로마군의 뒤를 공격했다. 이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무려 25000명이 전사하고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또 하나의 영웅

 

 

이제 로마인들은 정면 대결에서 카르타고군에게 승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특히 한니발이라는 이름은 자는 아이도 깨울 만큼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기서 만약 한니발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탈리아 전역을 접수했다면 훗날 유럽 대신 북아프리카가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유럽 문명은 없었을 테고……. 그런 사태를 방지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한니발은 애초부터 로마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 그의 목표는 로마를 제압하는 정도에서 카르타고와 로마가 공존하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둘째, 설사 로마를 완전히 멸망시킬 의도가 있었다 해도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니발은 로마의 주력군을 궤멸시켰지만 여전히 방어망이 강력한 로마의 도시들을 빼앗을 힘은 없었다. 특히 로마 주변 중부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은 여전히 로마에 대한 신뢰를 지키고 있었다. 셋째, 로마는 아직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니발이 2년 동안 이탈리아를 유린했어도 아직 카르타고 본국에서 지원군이 이탈리아로 오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칸나이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10년이 넘도록 한니발은 로마군과 대치하면서 소모전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마케도니아와 연합 전선을 이루는 데 성공했지만 카르타고 본대가 오지 않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원정 전에 한니발은 동쪽의 마케도니아, 남쪽의 카르타고 본대와 협공해 로마를 삼면으로 압박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에는 제자리걸음의 기간이었지만 로마에는 권토중래의 발판을 마련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로마에서도 영웅이 탄생했다. 기원전 210년 로마는 스물다섯 살의 야심 찬 젊은이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기원전 236년경~기원전 184)에게 에스파냐 원정군을 맡기는 모험수를 던졌다. 과연 승부수가 통했다. 스키피오는 자신의 개인적 우상이던 한니발의 초승달 포진을 모방해 카르타고 최대의 속주인 에스파냐를 5년 만에 정복하고 개선했다. 전황은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로마의 함선 한니발에게 무너진 로마가 힘을 회복할 수 있었던 큰 이유는 해군 덕분이었다. 한니발 군대가 10년 이상이나 로마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마 해군은 카르타고 본국의 군대가 지중해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국 전쟁은 정복군에게 불리한 장기전으로 바뀌었고 로마는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으니, 일등공신은 로마의 함대였다.

 

 

때를 틈타 로마 원로원은 총공격을 주장했으나 스키피오의 생각은 달랐다. 한니발의 전술로 한니발의 출발점인 에스파냐를 정복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한니발이 했듯이 카르타고 본토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적을 영토 내에 두고 적의 본토를 친다는 것은 과감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그 모든 게 해상을 로마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원로원의 불신에 찬 시선을 뒤로하고 스키피오는 기원전 204년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했다. 스키피오의 전략은 적중했다. 1년에 걸쳐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토를 유린하자 마침내 한니발도 더 이상 이탈리아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불을 지른 스키피오와 불을 끄러 온 한니발, 기원전 202년 두 영웅은 카르타고 부근 자마의 평원에서 숙명의 결전을 벌였다. 양측의 병력은 엇비슷했으나 한니발의 기병은 스키피오의 절반 수준이었다. 바로 이 점이 자마 전투의 승패를 갈랐다. 기병의 열세로 초승달 포진을 구사할 수 없게 된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로 대체했다. 그러나 로마의 도시들을 정복할 때 유용했던 그 비장의 무기는 초승달 포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스키피오는 코끼리 부대에 대비해 나팔을 준비해두었다. 로마군의 요란한 나팔소리에 코끼리들이 혼비백산하면서 초승달 포진은 무너졌다. 로마에서 16년간이나 싸운 베테랑 전사들이 최후의 전투에 나섰으나 로마 기병들이 카르타고 기병들을 물리친 다음 전투에 합류하자 승부의 추는 일거에 로마 측으로 기울었다.

 

2차전의 승부로 로마와 카르타고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평화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로마는 카르타고의 무장을 해제했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금지했으며, 막대한 전쟁 배상금마저 물렸다.

 

그런데 3차전은 왜 필요했을까? 그것은 로마의 잔인한 확인 사살이었다. 카르타고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어놓고도 로마는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만큼 카르타고는 꿈에서조차 지워버리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런데 꿈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현실에서는 지워버리는 게 가능하지 않은가? 로마는 이 기회에 카르타고를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릴 음모를 꾸몄다.

 

더 이상의 전쟁은 해봤자 뻔한 승부였다. 단지 전쟁의 구실만 필요했던 로마는 그 구실마저도 만들어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인접국인 누미디아를 부추겨 카르타고를 공격하도록 했다. 조약에 따라 카르타고는 타국과의 전쟁 금지라는 조항에 묶여 있었으니, 누미디아의 공격은 공격이라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웠다. 고문에 못 이긴 카르타고가 호신용 칼을 빼든 것은 3차전(기원전 149~기원전 146)의 구실이 되었다.

 

로마의 공격은 잔인했다. 카르타고의 전 시민은 필사적으로 최후의 방어전을 펼치고는 장렬히 전사했다. 로마군은 살아남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았다. 그리고 카르타고 성을 완전히 부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로마 제국은 그렇게 피 구덩이 속에서 자라났다.

 

 

카르타고의 흔적 카르타고의 중요 도시 중 하나였던 비르사의 유적이다. 카르타고의 재기를 두려워한 로마는 카르타고의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지금도 그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 유적은 현재도 계속 발굴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유적인지 흔적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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