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고대의 군국주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붕괴로 인한 힘의 공백, 그리고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철기 문명은 오리엔트 세계를 다시금 여러 세력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이집트는 여전히 존재했으나 건재하지는 않았다.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오히려 기원전 10세기~기원전 7세기까지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지배를 받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스라엘 왕국과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배하는 도시국가들이 생겨났고, 히타이트의 잔존 세력은 옛 고향 근처인 아나톨리아 동남부로 돌아가 카르케미시, 밀리드, 타발 등의 작은 도시 국가들을 이루고 근근이 살아갔다. 아나톨리아 고원에는 서쪽의 유럽에서 온 프리지아와 새로 통일을 이룬 우라르투가 터를 잡았다. 또한 요르단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한창 대립하던 시기에 이를 피해 이동해온 셈족의 아람인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 동쪽 엘람 북부는 인도·유럽계의 신흥 세력인 메디아가 지배했다.
다시 분열기일까? 하지만 분열 상태이기는 해도 이 시기는 혼란기라기보다 전환기였다. 오리엔트는 바야흐로 통일을 눈앞에 둔 진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의 주체로 등장한 세력은 아시리아라는 강력한 군사 국가였다.
사실 아시리아는 신흥 국가가 아니었다. 아시리아의 역사는 기원전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민족적 기원은 셈족이었으나 정치적 통합체를 이루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인도·유럽계와 혼혈을 이루었다. 그래선지 아시리아인들은 기질이 사납고 체격도 건장했다. 그러나 그런 기질과 체격에 걸맞지 않게 아시리아는 기원전 12세기까지 오리엔트 역사 무대의 주역은커녕 조역으로도 등장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아시리아는 미탄니에 눌려 지내다가, 미탄니가 히타이트의 압력으로 쇠퇴한 틈을 타 슬슬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위축되어 힘의 공백이 성립한 덕분에 동부 지중해 연안 국가들은 경제와 무역 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군사적으로 가장 성장한 나라는 아시리아였다. 기원전 12세기 후반 아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는 재빨리 히타이트의 옛 영토를 손에 넣고 세력을 확장했다【이집트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런대로 국가를 보존한 데 비해 히타이트가 그러지 못한 것은 이 지역에 아시리아가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시리아의 강역은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 북쪽으로는 흑해, 동남쪽으로는 바빌론에 이를 만큼 광대했다. 그런데 왜 앞에서 살펴본 기원 전 10세기 무렵의 세력 판도에서는 아시리아가 서열에서 빠졌을까? 그것은 잦은 내란과 아람인의 견제 때문에 아시리아가 200년 가까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 첨단 무기 고대의 군사 강국 아시리아는 최초로 기병을 전투에 활용했다. 게다가 병사들은 그림에서처럼 쇠미늘 갑옷까지 입었으니 당시로서는 최첨단 신무기를 지녔던 셈이다. 히타이트에서 전수받은 철기 문화를 오로지 무기 개발에 이용한 그들의 호전성은 오랜 세월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시리아가 다시 오리엔트의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 전 9세기 초반이다. 오랜 침묵의 기간 동안 아시리아는 히타이트로부터 전수받은 철기 문화를 주로 무기 제작에 이용하면서 힘을 키웠다. 9세기 초반부터 아시리아는 그 힘을 써먹기로 한다. 아시리아의 정복 활동은 오리엔트 세계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잔인하고 파괴적인 과정이었다.
아시리아는 정복지를 철저히 약탈하고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러고는 거의 잿더미가 된 폐허에 자국민들을 집단 이주시켜 피정복민의 저항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했다. 아시리아인들은 아슈르라는 전쟁의 신을 섬겼으므로 정복과 파괴는 그들의 종교에 전혀 어긋나지 않았다. 이러한 파괴성은 어쩌면 티그리스 강 상류의 척박한 곳을 고향으로 하는 아시리아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정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천 년 동안 그 지역에서 강대국들에 눌려 명맥을 존속하던 그들에게는 힘의 공백이 가져다준 기회를 이용해 지역의 패자가 되는 길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호랑이들이 사라진 숲이라고 해도 힘깨나 쓰는 늑대들은 남아 있었으므로 통일은 말만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는 영웅을 낳았다. 아시리아의 정복 영웅인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재위 기원전 746~기원전 727)는 기병과 전차를 결합한 전술을 내세워 누구도 이루지 못한 오리엔트 전역의 정복에 나섰다. 먼저 북부의 우라르투를 제압해 후방을 다지고 나서 동쪽의 메디아를 정복하고, 교통상으로 오리엔트의 중심이자 최대의 쟁탈지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이로써 그는 일찍이 사르곤 1세와 함무라비가 누렸던 정복왕의 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더욱이 두 정복 선배와 달리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위업은 당대로만 끝나지 않았기에 더 가치가 있었다. 그가 정복의 기반을 다져놓은 데 힘입어 사르곤 2세는 스키타이와 킴메르를 정복했고【당시 스키타이인의 이동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스키타이는 지금의 아르메니아를 고향으로 하는 인도·유럽어족으로서 세계 최초의 기마 유목민족으로 불린다. 아시리아의 압박을 받은 스키타이는 대규모 민족이동을 했는데, 그 범위가 무척 방대했다. 서쪽으로는 러시아 남부를 거쳐 폴란드와 독일 동부에까지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중국 북방의 몽골 초원을 거쳐 동북아시아에까지 왔다.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크게 횡단한 셈이다. 심지어 스키타이는 한반도 남부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라의 금관에 등장하는 사슴뿔 장식이나 토기에서 스키타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689년에는 센나케리브가 바빌론을 함락시켰다. 계속해서 기원전 671년에는 에사르하돈이 이집트를 정복했고, 기원전 639년에는 아슈르바니팔이 엘람을 멸망시켰다. 이것으로 아시리아는 역사상 최초로 오리엔트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찬란한 고대 문명을 자랑하는 오리엔트 세계에서 아시리아는 ‘별종’에 가까운 군국주의 국가였다. 일찍부터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확립했을 뿐 아니라 국민 개병제를 실시했고, 전쟁의 신을 섬길 정도로 호전성을 과시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아시리아의 유물이나 기록을 보아도 군사적인 내용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심지어 왕궁의 그림이나 조각에도 전쟁을 묘사한 것 이외에 다른 주제가 없을 정도다.
이렇게 아시리아가 고대사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군국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 이유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까지 300년 가까이 아시리아의 군대는 전쟁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었다). 서구 역사가들은 강력한 군주권을 뜻하는 말로 흔히 ‘동양적 전제군주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바로 아시리아의 정복 왕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 아시리아의 노예 궁전을 짓기 위해 돌을 나르고 있는 아시리아의 노예들이다. 군사 정복으로 얻은 전쟁 포로들일 텐데, 이들이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화려한 궁전들을 지었다. 아시리아는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잔인함으로 널리 악명을 떨친 탓에 『구약성서』에서도 앗수르(아시리아)와 산헤립(센나케리브)은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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