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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3부, 3장 또 하나의 영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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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3부, 3장 또 하나의 영웅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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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카르타고와 숙명의 대결을 벌이는 와중에도 로마의 정복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정복은 로마의 전 국민적인 활로였으므로 전쟁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인구에 비해 토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출범한 로마는 마치 달려야만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정복을 계속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었다.

 

지중해의 주인을 결정하는 중대한 2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는 도중에도 로마는 정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실은 전쟁 수행을 위해서라도 늦출 수 없었다). 정복의 방향은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 그중에서도 일차적인 대상은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장악하고 있는 마케도니아였다. 처음에는 마케도니아를 영토화하겠다는 의도까지는 없었던 로마는 두 차례의 접전(1,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통해 마케도니아의 실력을 파악하게 되자 야망의 수위를 높였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거리낄 게 없어지자 로마는 전면전에 나섰다. 예정대로 마케도니아를 멸망시킨 뒤에는 내친 김에 시리아의 소아시아 영토마저 정복해 이곳에 아시아 속주를 건설했다. 이 기세에 겁을 먹은 이집트는 즉시 꼬리를 내리고 로마에 접근했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의 후예로 자처했던 강성한 헬레니즘 3왕국은 모두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지중해 세계를 완전히 통일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정복은 끝났다. 그렇다면 로마 시민들, 특히 늘 토지에 굶주려 있던 평민들은 과연 만족했을까? 정복의 결실이 그들에게 돌아갔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버는 자와 쓰는 자가 다른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로마의 평민들이 피를 흘리며 가꾼 정복의 열매는 결국 소수 귀족들의 차지였다. 로마의 귀족들은 정복으로 얻은 토지를 독점하면서 점점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그 결과 노예 노동으로 경작하는 대농장이 생겨났는데, 이것을 라티푼디움이라고 부른다노예는 동양과 서양의 역사에 모두 었지만 그 성격에는 차이가 있다. 라티움의 경우에서 보듯이, 서양의 노예는 로 경제적 생산을 담당했다. 그러나 의 노예, 즉 노비는 주로 귀족들의 집안서 부리는 종복이었다. 동양의 노비와 의 노예는 신분적으로 엄격하게 구분세습되었지만, 동양의 경우는 주로 지배 피지배라는 정치적 의미가 강한 반면, 서양의 경우는 착취 - 피착취라는 경제적 가 강했다. 그 때문에 서양의 노예는 동양의 노비보다 어느 정도 신분상의 자유를 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에 흉년들어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그 마을 주민들이 몽땅 이웃 마을의 노예로 자원했다. 또한 노예주도 노예를 먹여 하는 의무가 있었고, 그럴 능력이 노예를 해방해야 했다. 반면 동양의 노비주인과 생사를 같이해야 했다.

 

 

그래도 파이가 워낙 크다 보니 평민들 중에도 정복의 열매를 맛본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들과 달리 토지 소유보다 정복의 부산물로 부를 늘렸다. 몸이 커지면 살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로마의 몸이 커짐에 따라 순환기 계통도 더욱 방대해졌다. 일부 부유한 평민들은 무역과 도로 건설, 각종 군납업과 토목공사 등을 독차지하면서 더욱 큰 재력가로 성장했다. 특히 귀족들이 신분상 손댈 수 없는 속주에서의 징세 청부업은 그들에게 가장 큰 수익원이었다상업을 천시하는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에서도 귀족 대신 평민이 무역업에 뛰어들어 부를 쌓음으로써 평민의 신분 상승과 민주정을 가져온 바 있었다. 그러나 토지가 작고 정복 활동이 없었던 그리스에 비해 로마에서는 지주 세력이 건재했으므로 그리스처럼 쉽사리 평민들에게 정치적 지배권이 넘어가지 못했다. 고대사회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땅이 최고의 재산이었다. 한창 때의 아테네가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도 지주층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징세 청부업의 발달은 금융업을 탄생시켰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원시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 평민들을 가리켜 에퀴테스(equites)라고 불렀는데, 훗날 중세에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기사(騎士)는 바로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이들은 자비로 무장을 담당해 기병으로 정복 전쟁에 참여했으므로 기사라는 직함을 얻었다).

 

그러나 에퀴테스는 어디까지나 출세한 일부 평민들일 뿐이었고(게다가 그들은 귀족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대다수 평민들은 정복으로 나라의 영토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더욱 가난해졌다. 버는 자가 없고 쓰는 자만 남는다면 나라가 존속할 수 없다. 이런 위기감은 점차 귀족들의 일부에게도 전해졌다. 그 각성한 귀족들 중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 기원전 163~기원전 133)가 있었다.

 

자유농민이 몰락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농업 생산량이 줄어든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라티푼디움은 농업의 독점화를 뜻할 뿐이므로 총생산량에는 큰 변동이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군사력이었다. 아무리 유능한 장군과 기사 들이 있다 해도 평민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더구나 로마군의 기본 전술은 군단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므로 병사의 수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포에니 전쟁에 직접 참전해 싸운 경험도 있었던 티베리우스는 평민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로마의 미래는 없다고 단정 지었다.

 

기원전 133,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호민관으로 선출된 티베리우스는 개혁의 선례를 찾아보았다. 선례는 있었다. 멀리는 그리스의 경험이 있었고, 가까이는 250년 전 로마의 경험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페리클레스의 민주적 개혁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리키니우스 법을 부활시켜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는 방법을 구상했다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연설에 능했듯이(132~133쪽 참조), 티베리우스도 그에 못지않은 웅변가였다. 페리클레스가 연설에서 평민들의 정치적 평등을 강조했다면, 티베리우스는 다음의 연설에서 보듯이 경제적 평등을 부르짖었다. “들판의 짐승들도 저마다 자신의 굴을 가지고 있는데, 이탈리아를 위해서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은 공기와 햇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 그들(귀족과 장군 들)은 여러분(평민들)을 세계의 주인이라고 부르나 여러분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뼘의 땅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과거의 로마가 아닌 만큼 토지 상한선을 500유게라로 정한 리키니우스 법을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토지 상한선을 1000유게라로 늘리고,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해 무산 시민들에게 추첨을 통해 30유게라씩 토지를 분배하도록 했다(세 명으로 된 농지 분배 위원에는 티베리우스 자신과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끼어 있었다).

 

물론 원로원은 잔뜩 입이 부었으나 일단은 참았다. 어차피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들은 호민관의 임기가 1년이라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달랬다. 더욱이 호민관은 한 번 임기를 지내고 나서는 재입후보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이 관례에 따랐더라면 티베리우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시동을 건 개혁은 한두 해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티푼디움의 노예들 신분제는 세계 역사 어디서나 현대 이전까지 늘 존재했으나 서양의 신분과 동양의 신분은 의미가 약간 다르다. 서양의 신분은 사회적 역할과 일치했고, 동양의 신분은 사회적 역할과 무관하게 정치적 지배의 의미가 강했다. 이 로마 부조에 묘사된 라티푼디움의 노예들은 경제적 생산만을 담당했지만, 동양의 노예(노비)들은 주인의 명에 따라 경제만이 아니라 군사 분야에도 투입될 수 있었다.

 

 

이듬해 티베리우스는 과감하게 다시 호민관에 입후보했다. 그러자 원로원 귀족들도 더 이상 놔두고 볼 수 없었다. 평민들을 위한 개혁도 거슬렸지만 이제는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참주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리스의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에트루리아의 타르퀴니우스가 어떻게 쫓겨났는지를 보라! 티베리우스는 참주가 되려 하고 있다! 마침내 귀족들은 쥐고만 있던 칼자루를 흔들기로 했다. 칼날을 쥐고 모험하던 티베리우스는 결국 원로원이 사주한 폭도들의 손에 암살되고 말았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남긴 선례로 인해 호민관도 재선출될 수 있다는 인식이 싹텄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개혁도 시도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 개혁의 총대를 멘 사람은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기원전 153~121)였다. 형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그는 개혁의 지지 세력이 튼튼하지 않으면 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이 된 그는 에퀴테스를 귀족들과 분리시키기로 했다.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개혁 보조 세력을 강화하는 조치니 일석이조였다.

 

회유에 목적이 있었던 만큼 그 방법은 채찍이 아니라 당근이었다. 가이우스는 에퀴테스의 주 수입원이던 속주에서의 징세 청부권을 더욱 확대해주었다. 게다가 그들에게 속주를 다스리는 법정의 배심원 자격까지 부여했다. 이제 에퀴테스는 적어도 속주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속주에서 무제한적인 착취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에퀴테스는 오늘날의 재벌이 부럽지 않을 만큼 막대한 부를 쌓았다. 결국 가이우스의 개혁은 식민지 착취를 바탕으로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나라의 테두리를 벗어나 만민의 이익을 위하는 보편적인 개혁이 있을 수 있을까? 가이우스가 개혁하려는 것은 로마이지 속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에퀴테스가 개혁의 보조 세력이라면 무산 시민들은 개혁의 주체였다. 당근으로 에퀴테스를 중립화시키는 데 성공한 가이우스는 이제 무산 시민들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무산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생계를 해결하는 것, 그다음은 토지를 얻는 것이었다. 첫째 과제를 위해 가이우스는 국가가 곡물 유통에 개입해 곡물을 아주 싼 가격으로 무산 시민들에게 공급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시장가격의 반값이었으나 나중에는 아예 무상으로 식량이 제공되었다. 둘째 과제를 위해서는 해외 식민지 개척이라는 전통적인 정책을 크게 확대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북아프리카(특히 카르타고) 지역에 많은 식민시가 건설되거나 재건되었다(이후 이탈리아인의 대규모 해외 이주는 19세기 말 미국으로 떠나는 이탈리아 빈민들에게서나 다시 보게 된다).

 

 

계속되는 정복 로마는 마치 정복을 중단하면 쓰러지는 자전거와 같았다.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는데도 로마는 정복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카르타고와 겨룬 것은 해상권을 확보한 것일 뿐 로마에 절실한 토지의 갈증을 풀어준 것은 아니었다. 이 부조는 로마군이 북부의 이민족(게르만)을 정복한 뒤 항복을 받는 장면이다. 오른쪽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이민족의 우두머리는 머리털과 수염을 길게 길러 로마인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시절보다 더욱 분노했다. 그들이 보기에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그러나 칼자루는 여전히 그들에게 있었다. 적당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가이우스를 그의 형처럼 보내버릴 자신이 있었다. 대부분의 개혁이 그렇듯이, 그 계기는 개혁 세력 내부에서 나왔다.

 

개혁의 바람을 타고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이 로마와 동등한 정도의 시민권을 요구하고 나서자 가이우스는 옳다구나 하고 여겼다. 이제 개혁의 물결이 전 이탈리아로 퍼지는구나 싶었겠지만, 그것은 판단 착오였다. 개혁이란 원래 한 나라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가이우스의 지지 세력은 자신들이 가진 로마 시민권을 동맹시 시민들에게도 부여한다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혁 세력은 찬반양론으로 분열되었고, 그 와중에 가이우스는 기원전 121년의 호민관 재선거에서 낙선했다. 간신히 피워 올린 개혁의 촛불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풀었다.

 

격론은 폭동으로 이어졌다. 그제야 원로원은 계엄령을 내리고 가이우스를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궁지에 몰린 가이우스는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평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공화정의 이념을 부활시키려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은 실패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개혁의 실패는 제정의 씨앗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이미 공화정의 보자기로 감쌀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으며, 강력한 중심을 가진 중앙집권적 제정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그 취지는 진보적이었으나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시대착오적이었던 셈이다. 역사의 평가는 이렇게 양면적이다.

 

 

원로원 의원들 이름은 공화정이지만 사실 로마 공화정은 귀족정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평민들은 귀족이 장악한 원로원과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여기에 도전한 그라쿠스 형제는 결국 이들의 책략으로 개혁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그림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모습으로 이탈리아 국회에 걸려 있다.

 

 

 고대의 군사독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예견했던 대로, 개혁의 실패는 곧장 군사력의 쇠퇴로 이어졌다. 로마는 지중해를 정복했으나 아직 확고한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특히 북부의 강성한 갈리아인과 게르만족게르만족은 특정한 민족의 명칭이 아니라 남유럽의 로마인들이 중부 유럽에 사는 여러 민족을 총칭하던 명칭이다(즉 게르만족이라는 민족은 없다). 동유럽의 고트족, 독일 북부의 반달족, 수에비족, 서유럽의 프랑크족 등이 다 게르만족에 속한다. 물론 그들이 게르만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게 아니라 로마인들이 그렇게 분류했을 뿐이다. 다만 갈리아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켈트족은 보통 게르만족에 포함시키지 않는다은 결코 로마의 지배를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로마 역시 지중해 세계에 안주하는 데 머물 뿐 북쪽의 중부 유럽마저 정복하려 하지는 않았다. 당시 로마의 원로원은 평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민중파와 귀족 세력이 지원하는 벌족파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고 있던 터라 정복은커녕 내란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마치 군사력이 약화된 것을 추궁이라도 하듯이,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튜턴족이 자주 이탈리아를 침략했고, 지중해 너머 북아프리카에서는 누미디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난세의 영웅은 군대에서 나오는 법이다. 위기를 틈타 무능한 원로원을 제치고 로마의 지배자로 우뚝 솟은 인물은 민중파의 장군인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 157년경~기원전 86)였다.

 

누미디아 반란의 진압으로 국민적 명성을 얻은 마리우스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정복 국가 로마의 명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자유농민이 몰락한 탓에 어차피 로마의 군대는 대수술이 필요했다. 마리우스는 무산 시민 출신의 지원병들로 직업 군대를 편성했다. 새로운 군대의 병사들은 무장과 더불어 봉급도 받았으므로, 마리우스의 군대 개혁은 로마의 군사력을 회복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실업난을 극복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병사들은 16년이나 복무해야 했지만, 퇴역하면 퇴직금으로 토지도 받을 수 있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혹독한 훈련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병사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장군에 대한 충성으로 바꾸었다. 심지어 병사들은 자신을 마리우스의 노새라고 부를 정도였다. 기원전 102년에 킴브리족과 튜턴족의 대규모 침략을 막아낸 것은 바로 그 병사들이었다.

 

노새들의 공로에 힘입어 노새 주인은 네 차례나 연속해 집정관에 선출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비록 킴브리족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비상사태가 지속된 덕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리우스의 장기 집권은 군사독재의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마리우스가 황제가 될 만한 능력과 의지를 갖추었다면 로마의 제정은 훨씬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저 군인으로서 뛰어날 뿐 정치적 능력이 부족하고 정치적 의지도 미약하고 정치적 감각도 모자랐다. 기원전 91년에 로마의 동맹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새들이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탓에, 마리우스는 벌족파의 지원을 받은 부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 138년경~기원전 78)에게 밀려났다(이때 동맹시들은 결국 로마 시민권을 얻어냈으니,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꿈은 그와 대립한 벌족파에 의해 실현된 셈이다).

 

 

독재자들 의회가 약해지면 군부를 기반으로 한 독재자가 등장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철칙이다. 평민들의 도전으로 원로원이 약해지자 로마에도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왼쪽은 1대 독재자인 마리우스, 오른쪽은 그 뒤를 이은 술라다. 이들은 결국 제정으로 향하게 되는 로마 정치의 과도기를 지배했다.

 

 

마침 술라의 능력을 시험할 기회가 왔다. 밖으로는 이민족들의 침략, 안으로는 동맹시들의 반란에 시달리던 로마에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흑해 연안에 자리 잡은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가 로마 정복을 공공연히 선언하고 나섰다미트리다테스는 페르시아 왕가의 후손이라고 자처했는데, 실은 파르티아의 실력 가문 출신이었다. 파르티아는 중국 한 무제가 파견한 서역 원정대와 접촉해 중국 역사에 안식국(安息國)이라는 좋은 이름을 얻었다(종횡무진 동양사, 111쪽 참조). 그러나 중국에서의 이미지는 좋았으나 로마에 파르티아는 지독한 골칫거리였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무너진 뒤 힘의 공백을 틈타 시리아 동부까지 손에 넣은 파르티아는 이후 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을 심하게 괴롭혔으며, 로마의 수없는 원정에도 굴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된다. 한니발 이래 최대의 강적인 미트리다테스는 소아시아를 근거지로 순식간에 그리스를 포함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손에 넣었다. 비록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문명의 중심지는 동부 지중해인 데다 발칸과 소아시아는 로마의 알짜배기 속주였다. 속주에서 착취하는 세금이 없으면 로마의 재정은 파탄이 나고 말 터였다. 원로원은 새로 집정관에 오른 술라에게 미트리다테스를 정복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상관으로 모셨던 마리우스를 축출하고 집정관에 오른 술라로서는 나라의 운명을 논하기 전에 장기 집권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회였다.

 

기원전 87년에 3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탈리아를 떠난 술라는 탁월한 군단 전술을 선보이며 그리스를 탈환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소아시아까지 정복한다면 로마의 지배자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미트리다테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기원전 84년에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평화조약을 맺고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냈고 미트리다테스가 빼앗은 로마의 영토도 돌려받았으니, 일단 전과는 대성공이었다.

 

국민적 영웅으로 로마에 개선한 술라의 눈에는 원로원도 우습게 보였다. 그는 우선 반대파를 가차 없이 숙청하고, 부하들에게 충분한 논공행상을 마친 뒤 스스로 종신 독재관에 취임했다(독재관은 예전부터 있는 직위였으나 원래 임기가 1년이고 2차 포에니 전쟁 이래로 사실상 사라진 상태였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의 전통은 완전히 깨졌다. 1만 명의 친위대를 거느리고 막대한 부를 소유한 데다 원로원 의원들마저 마음대로 임명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술라의 공포정치에 맞설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고대적 군사독재 체제는 얼마 뒤에 성립하게 될 제정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현대사회에서는 독재자의 최후가 대개 비참하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공포정치를 휘두르던 술라는, 비록 수는 충분히 누리지 못했으나 권력의 정상에서 편안하게 죽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군사독재의 경험은 사라지기는커녕 로마 정치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죽자 일단은 원로원이 권력을 되찾기는 했지만, 곧 술라의 뒤를 이어 군인 정치의 전통을 이어갈 인물이 나타났다.

 

술라가 그랬듯이, 폼페이우스(Magnus Gnaeus Pompeius, 기원전 106~기원전 48)는 술라의 부하였다가 상관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적 도약을 이루었다. 또한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통해 권력을 잡았듯이, 폼페이우스 역시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과시할 만한 사건을 맞이했다. 로마에서 군사적 공헌은 말하자면 권좌에 오르기 위한 입시와 같았다.

 

그 시험장은 에스파냐였다. 아시아 속주에 버금가는 로마의 금고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우두머리는 마리우스를 추종하던 세르토리우스였는데, 그는 이미 술라의 시대에 에스파냐에서 독자적 정권을 수립해 로마에 대립하는 중이었다. 기원전 76년에 원로원의 요청을 받은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냐로 출장 겸 출정을 떠나 4년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로 개선했다. 10여 년전 술라의 개선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젊은 폼페이우스는 술라만큼 카리스마가 강력하지 못했고, 또 로마 원로원은 술라의 공포정치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에 오를 수 있는 법적 연령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이인 데다 필요한 공직 경력도 모자랐다.

 

그렇잖아도 1인 집권이 어려운 분위기였는데, 마침 폼페이우스에게는 강력한 경쟁자도 있었다. 바로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기원전 115년경~기원전 53)라는 재산가였다. 부유한 가문 출신인 크라수스는 술라의 시대에 숙청된 사람들의 재산을 사들여 로마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크라수스의 이재 감각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인구가 집중되면서 로마시에서는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소방서가 없었으므로 크라수스는 자비로 소방대를 조직했다.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면 크라수스의 소방대는 즉시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불을 끄기 전에 먼저 불타고 있는 건물에 대한 흥정이 시작되었다. 협상이 이루어지면 그 건물은 크라수스의 소유가 되므로 즉각 진화 작업에 들어갔다. 협상이 결렬되면 소방대는 건물이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불구경만 했다.

 

사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경쟁자라기보다는 협력자였다. 둘 중 누구도 술라의 빈자리를 메울 만한 힘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은 고대사회 최대의 노예 반란인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한 것이었다.

 

라티푼디움이 발달하면서 로마로 유입되는 노예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노예의 용도와 종류도 다양해졌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은 바로 로마의 경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이는 검투사들이었다.

 

기원전 73년에 검투사들은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를 지도자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프로 싸움꾼들이 일으킨 반란이니 무력이 만만치 않았다. 봉기의 횃불이 치솟자 다른 노예들도 속속 참가해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한동안 이탈리아 중부 일대를 유린하던 노예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킴브리족과 튜턴족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주동자인 스파르타쿠스도 자기 고향인 트라키아로 가려면 북쪽으로 가야 했다.

 

 

2의 로마 에스파냐는 로마 시대 전체를 통해 로마의 가장 부유한 속주였다. 아시아 속주가 지중해 무역의 측면에서 소중했다면, 에스파냐는 풍부한 광산과 노예 노동력으로 중요했으며, 사실상 로마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사진은 에스파냐의 세고비아에 남아 있는 로마의 수도(水道) 시설이다. 아치형의 구조물 위로 물이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폼페이우스가 로마에 있었더라면 당연히 원로원은 그에게 진압을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는 에스파냐에서 세르토리우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초기 진압은 크라수스의 몫이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강력한 군대가 있어야 하지만, 크라수스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돈이 있었다. 돈으로 군대를 사면 된다. 크라수스는 대규모 용병대를 구성해 반란의 진압에 나섰다. 때마침 에스파냐에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폼페이우스도 스파르타쿠스의 잔당을 토벌했다. 당시 사로잡힌 노예군 전사 6000명은 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에 묶여 처형되었다.

 

이 전공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 함께 집정관에 올랐다. 그러나 문제는 두 사람 다 여전히 자격 미달이라는 점이다. 민중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나 폼페이우스는 아직도 자신의 기반이 취약하다고 여겼다. 크라수스는 돈이 많으니 어떻게든 자격을 얻어내겠지만 폼페이우스는 처지가 달랐다. 그래서 그는 크라수스가 그랬듯이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더 큰 전공을 세우는 것이다. 없는 전쟁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에 폼페이우스의 눈에 아직 로마에 저항하고 있는 미트리다테스와 아직 로마가 정복하지 않은 시리아가 들어왔다. 게다가 로마가 잠시 관리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지중해에는 해적들이 들끓었다.

 

다시 칼을 뽑아든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7년 해적 소탕에 나섰고, 이듬해에는 미트리다테스를 완전히 굴복시켰다(풍운아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의 포로가 되는 대신 부하의 손을 빌려 자살했다). 곧이어 기원전 64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해 셀레우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를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불과 3년 만에 로마의 골칫거리를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

 

이처럼 빛나는 업적에도 폼페이우스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로마로 개선한 그는 자신의 충직한 군대마저 해산하고 원로원에 충성할 뜻을 보였으나 반대파는 좀처럼 그를 승인하려 들지 않았다. 하긴, 아무리 호랑이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호랑이를 자기 집에 들일 사람은 없으리라.

 

폼페이우스의 좌절을 절대적인 호기로 삼은 사람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기원전 44)였다. 우직한 폼페이우스와 달리 판단력이 뛰어나고 영민한 카이사르는 사실상의 실력자이면서도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3두 정치 시대를 열었다(3두 정치라는 말은 원래 그들의 정적들이 그들을 머리가 셋 달린 괴물이라는 뜻으로 부른 데서 나온 경멸적인 명칭이다).

 

 

죽음의 결투 로마인들은 신체가 건장한 노예들을 뽑아 검투사로 양성했다. 물론 로마 군단의 병사로 쓰려는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들은 경기장에서 맹수들과 싸우거나 자기들끼리 목숨을 건 대결을 벌여 로마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역할이었다. 이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일으켰을 때 로마인들은 마치 사자들이 우리를 뛰쳐나온 것처럼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대권 후보의 등장

 

 

사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친척이고 명문 귀족 출신이라는 점 이외에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다른 두 사람에 비해 나이도 가장 어렸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에게는 군대, 크라수스에게는 돈이 있다면, 카이사르에게는 신분과 자질, 그리고 탁월한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3의 한 사람이라는 후광을 이용해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이된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민회를 통해 정책을 처리했으며, 때로는 민회마저 무시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는 독재의 본능을 드러낸 셈이다(집정관은 두 명이었으나 다른 한 명은 전혀 권력이 없었다. 심지어 카이사르와 율리우스가 집정관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그 바로 전에 집정관을 지냈고 후대에 철학자로도 잘 알려진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기원전 43)는 당시 카이사르의 전횡을 사실상의 왕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는 아직 이 되기에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활발한 정치 활동으로 로마 시민들의 폭넓은 인기를 얻기는 했으나 아직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는 게 문제였다. 당시의 업적이라면 무엇보다 군사적 부문의 업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의 군 복무 경험 이외에는 지휘관으로서 활동한 경력조차 없었다.

 

카이사르가 집정관에서 물러난 기원전 58년에 로마 원로원은 가급적 그를 로마에서 멀리 떠나보내기 위해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카이사르로서도 바라 마지않는 명령이었다. 전공을 올릴 좋은 기회였으니까. 오늘날에도 야전군 지휘관의 경력이 없으면 군직에서 성공할 수 없는데,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원로원은 그가 변방에서 전사하기를 바랐겠지만, 카이사르는 오히려 야망에 부풀었다.

 

 

고뇌의 표정 카이사르가 암살되기 6년 전, 그러니까 그가 쉰 살 때 만들어진 흉상이다. 당시 그는 대머리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기서는 영화배우 같은 인상적인 미남으로 묘사되어 있다. 자신이 장차 암살될 운명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테니, 이 표정은 혹시 어떻게 제위에 오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아니었을까?

 

 

카이사르의 타고난 재능은 경험이 거의 전무한 군사 부문에서도 꽃을 피웠다. 그는 순식간에 휘하 장교들을 장악하고 탁월한 전술 운용과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러나 갈리아인들은 예로부터 로마의 껄끄러운 상대인 데다 드넓은 지역에 수많은 부족이 산재해 있어 결코 정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던 한창 때의 로마군도 갈리아를 정복할 생각은 언감생심이고 변방을 방어하는 데만 급급할 정도였다. 사실 갈리아의 부족들이 로마처럼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더라면 로마가 지중해의 주인이 되는 것조차 애초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갈리아에 온 카이사르는 초장부터 공세를 펼쳤다. 신속하게 전공을 세워 로마의 권력을 손 안에 넣겠다는 그의 야심으로 미루어보면 당연했다. 2년 만에 로마군은 갈리아의 부족들을 라인 강 너머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곧이어 벨기에의 벨가이족과 프랑스 서해안의 베네티족을 정복했다. 갈리아인이 북쪽으로 도망치자 로마군은 추격에 나섰다. 기원전 55년에 카이사르는 영국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까지 공략했다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침공은 비슷한 시기 우리 역사와 닮은 데가 있다. 동양에서 로마의 역할을 한 나라는 중국의 한 제국이다. 당시 한은 한반도 북부와 랴오둥을 정복하고 4을 세웠다. 브리타니아인들이 로마군에 거세게 저항했듯이, 한반도인들 역시 한군의 지배에 저항했고, 마침내 한4군을 멸망시켰다. 오늘날 영국사의 첫 부분이 로마의 브리타니아 침공으로 시작하듯이, 우리 역사의 첫 부분(고구려의 건국)도 그 무렵에 시작한다. 그러나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은, 오늘날 영국인들은 로마와의 접촉으로 영국 역사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대한민국도 중화인민공화국도 없었던 고대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점이다. 드디어 로마의 영향력은 세계의 서쪽 끝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비록 브리타니아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카이사르는 최소한 대륙의 갈리아인들만큼은 확실히 제압하는 전과를 올렸다. 초보 지휘관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대성공이었다. 카이사르의 업적이 로마에 알려지자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원로원은 당연히 기분이 꺼림칙했지만, 더 좌불안석인 것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다. 이대로 가면 3두라는 말이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리한 카이사르는 아직 그들의 용도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내치기는커녕 갈리아로 불러 다시금 3두의 위상을 굳게 다졌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맡고, 폼페이우스가 에스파냐를, 크라수스가 시리아를 맡는 선에서 공동의 이해관계를 확인하고 헤어졌다(당시 크라수스는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동부에 주력하고 있었다). 물론 로마의 원로원은 셋이 함께 공동으로 견제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노회한 원로원은 그냥 앉아서 당하려 하지 않았다. 사슬을 끊으려면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라! 그 약한 고리는 바로 폼페이우스였다. 카이사르보다 고분고분한 폼페이우스를 권좌에 앉히면 원로원이 실권을 계속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로원이 행동에 나서려는 순간 동쪽에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크라수스가 군기마저 빼앗기는 치욕스런 참패를 당하면서 전사하고 만 것이다. 이제 3두 체제는 깨졌다. 다시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데 성공한 원로원은 예정대로 폼페이우스에 대한 공작을 개시했다. 기원전 52년 원로원은 그를 단독 집정관에 앉혀 카이사르를 배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앞서 술라의 종신 집정관처럼 단독 집정관도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정 정치 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갈리아 정복 동쪽에는 파르티아, 서쪽에는 갈리아. 이들은 로마의 숙적이었다. 로마의 군사력 최강이었던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는 드디어 갈리아 정복에 성공하고 갈리아 전기(戰記)라는 책을 썼다. 사진은 로마 병사들이 갈리아인을 도륙하는 장면이다.

 

 

 권력과 죽음을 함께 얻은 카이사르

 

 

기원전 52년에 갈리아의 영웅 베르생제토릭스의 반란을 어렵사리 진압한 것을 끝으로 카이사르는 군사적 임무를 완수했다. 로마의 영토는 라인 강과 영국 해협까지 확장되었다. 라인 강 너머의 이민족과 브리타니아인에 대해서는, 비록 정복하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로마의 영향력 아래 제압했으므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대성공이었다.

 

예상한 대로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가 개선한다면 과거에 폰투스를 정복한 술라나 에스파냐 반란을 진압한 폼페이우스의 개선보다 훨씬 무게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공이 높은 만큼 원로원의 경계와 반발도 컸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개선해야 할까?

 

로마의 법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군대를 거느린 채 개선하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예전에 에스파냐에서 개선한 폼페이우스도 먼저 군대부터 해산시킨 것이었다. 기원전 49년 갈리아와 로마의 경계선인 루비콘 강까지 온 카이사르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강을 건널 것이냐, 아니면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입성할 것이냐?

 

물론 카이사르는 알지 못했지만, 1400년 뒤 한반도 북부 압록강에서는 이성계가 최영의 명령을 받고 랴오둥 정벌에 나섰다가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당시 이성계는 철군을 결정했고, 그 군대로 고려의 수도 개경을 함락시켜 조선이라는 새 나라를 열었다. 카이사르는 이성계의 쿠데타 선배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실 원로원은 이미 그해 초에 카이사르를 소환하고 그의 군대를 그의 정적인 다른 장군에게 넘겨준다는 결의를 했으니,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카이사르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군대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그의 입에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부르짖음이 나왔다(루비콘 강은 강이라기보다 작은 시내였으나 카이사르의 중대 결정으로 역사에 유명해졌다).

 

주사위를 던진 이상 카이사르는 원로원, 나아가 로마 공화정의 명맥을 끊어야 했다. 로마는 제국으로 가야 했다. 8년 동안이나 갈리아의 오지에서 숱한 전투 경험을 쌓은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는 거칠 것 없이 로마로 쳐들어갔다. 쿠데타라기보다는 정권의 접수였다. 원로원 의원들과 폼페이우스는 남쪽의 브룬디시움으로 가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로 도망쳤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에 굳게 의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세력들만 다시 규합한다면 카이사르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카이사르의 행마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불과 6주일 만에 에스파냐로 진군해 폼페이우스의 손발을 모조리 끊었다. 이제 남은 것은 폼페이우스의 목숨을 거두는 것뿐이었다.

 

기원전 48, 카이사르는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진군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야반도주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지배자들은 이제 어느 편에 붙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결국 그들의 손에 붙잡혀 살해되었다. 급한 불을 끈 카이사르는 여유를 가지고 이후 2년여 동안 나머지 반대파를 숙청했다.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카이사르는 이제 종신이든 단독이든 집정관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원전 46년에 그는 국가 비상사태에만 임시로 임명하던 독재관이라는 감투를 임기 10년으로 늘려 자기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아예 종신 독재관에 올랐다. 사실상의 왕이 된 것이다.

 

 

로마의 어린이들 어린이가 어른을 닮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 로마의 어린이들은 로마의 어른들처럼 병정놀이를 즐겼다. 이 모자이크 벽화에 등장한 로마의 어린이는 특이하게도 새들을 말로 삼아 전차를 끌게 하고 있다. 이 어린이가 자라서 뛰어난 군인이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참주를 그렇게 싫어하던 로마 시민들에게 한 가지 다행스런 사실은 카이사르가 왕이 될 자질과 역량이 충분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무관 출신인 술라처럼 무식한 공포정치를 하는 대신 공화정에 못지않은, 아니 공화정 시절보다 더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 그는 먼저 자신의 병사들을 비롯해 군대에 충분한 보상을 내려 권력의 물리적 기반을 안정시킨 뒤, 로마 시민권을 대폭 확대해 전 로마 영토의 통합을 도모했다(그가 피바람을 뿌렸던 갈리아에도 이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그의 업적 가운데 당시 로마 시민들에게보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달력이다. 카이사르는 지역마다 달랐던 달력을 통합해 새 달력을 만들었다. 이 달력은 그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이라고 부른다고대국가에서 달력은 대단히 중요했다. 무릇 국가에는 행사가 따르는 법인데, 달력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력이 없다면 국가 행사 중 가장 중요한 제사는 물론 왕의 생일이나 각료들의 회의, 군대 소집일도 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동양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경우 새로 왕조가 들어서면 즉시 달력을 만들고 연호(年號)를 정해서 주변의 조공국들에 배포했다. 달력은 천문학의 지식이 있어야 하므로 만들기도 어려웠지만, 동양의 경우에는 달력을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아무나 가지지 못했다.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로마의 전통적인 달력에서는 1년을 12개월로 하고 4년에 한 번씩 13개월로 했는데, 율리우스력에서는 오늘날처럼 1년을 12개월, 365일로 하고 윤년마다 2월을 29일로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하지만 그때까지 누적된 날들의 오차를 상쇄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율리우스력을 만든 기원전 46년에 90일을 추가해야 했다. 그래서 그해의 날수는 모두 445일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더 이상 오차가 없을 줄 믿고 이해를 혼돈의 마지막 해라고 불렀는데, 4년마다 하루를 추가해도 오차는 조금씩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달력은 16세기에 율리우스력을 개정한 그레고리력인데, 이것도 먼 훗날에는 오차가 누적되어 개정되어야 한다.

 

오랜만에 고대하던 정치의 안정을 되찾은 로마는 급속도로 번영했다. 당시 로마 시의 인구는 무려 10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후대에도 인구 100만 명 급의 도시는 19세기 세계 최대의 도시인 영국 런던에서나 볼 수 있게 된다.

 

원로원은 형식적인 기관으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명맥은 유지되었다. 원로원 의원 수는 900명으로 늘어났으나 거의 대다수를 카이사르가 임명했으므로 정치적으로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그랬어도 상징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원로원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거 공화정의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제정을 거의 이루고 권력을 독점한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없애야 했다. 그는 원로원의 기능만 마비시키면 될 줄 알고 마음을 놓았지만, 원로원이 가진 상징성은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기원전 443, 카이사르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파르티아뿐이었다. 크라수스가 죽은 뒤 로마에서 크라수스의 복수를 하자는 운동이 크게 일어나기도 했지만, 재정상의 이유에서도 카이사르는 시리아를 도저히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종신 독재관에 오른 지 두 달밖에 안 된 시점에서 국가 중대사를 처리하기는 무리였다. 그 두 달 동안 참주정치에 대한 두려움과 공화정의 옛 꿈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카이사르에 대한 분노와 우려를 극대화했다.

 

브루투스(Maretus Junius Brutis, 기원전 85~기원전 42)를 비롯한 원로원 귀족들은 315일에 연설을 하기 위해 원로원에 온 카이사르를 암살했다(회랑 앞에서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무차별적인 단도 공격을

받은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의 상처를 입고 죽었다). 카이사르는 며칠 뒤 파르티아 전선으로 출정을 떠날 예정이었다. 결국 카이사르에게 권력을 안겨준 루비콘 강의 주사위는 그에게 죽음마저도 안겨 주었다.

 

 

 정답은 제정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카이사르가 죽으면 공화정이 회복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바치던 군대가 있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오히려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그의 부관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년경~기원전 30)에게 뜻하지 않은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안토니우스는 먼저 암살자들을 처벌하고 싶었으나 아직은 절대 권력자가 죽은 충격으로 인해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를 틈 타 브루투스의 무리는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예전에 폼페이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로 달아났다. 안토니우스는 갓 잡은 권력부터 안정시키기 위해 카이사르의 기병대장이던 레피두스(Marcuss Aemilius Lepidus, 기원전 ?~기원전 13)와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공동 집권이 예상되는 순간 예기치 않은 인물이 끼어들었다.

 

파르티아 출정을 앞두고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다시 작성해두었다(암살을 대비한 게 아니라 곧 전장에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언장에서 그는 누이의 외손자인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기원전 63~기원후 14)를 양자로 지정해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내용을 남겼다. 일리리쿰(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서부)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즉각 로마로 왔다.

 

옥타비아누스는 겨우 열아홉 살의 청년이었으나 카이사르의 상속자라는 신분이었으므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의 권력을 그에게 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런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세 사람은 카이사르의 시대처럼 3두 체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번의 3두 체제는 카이사르 시대의 3두 체제와 성격이 크게 달랐다. 무엇보다 세 사람은 모두 카이사르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등에 업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이들의 위상은 균등하지 않았다. 로마 시민들이 신격화하는 카이사르의 혈육보다 더 정통성을 갖춘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옥타비아누스가 젊은 나이에 경력도 보잘것없음에도 혜성처럼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사실 잿밥(카이사르의 유산)을 더 중시한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안토니우스는 죽은 카이사르에게 더 충직했다. 권력이 얼추 안정되자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카이사르의 복수에 나선 것이다. 기원전 42년에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까지 가서 브루투스 일당을 격파했다(브루투스는 공화정의 꿈을 안은 채 자살했다). 그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러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안토니우스 격하 운동을 젊은이답지 않은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해 그는 스물도 안 된 나이로 집정관에 올랐다.

 

 

최초의 황제 약삭빠른 젊은이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물려준 유산을 최대한 활용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왼쪽은 악티움 해전을 기념한 메달이며, 오른쪽은 악티움 해전을 승리로 이끈 로마의 함선이다. 이집트의 함선은 큰 데 비해 로마의 함선은 작고 속도가 빨랐다.

 

 

기반이 취약했던 3두 정치는 예상외로 오래갔다. 그러나 그 기간은 옥타비아누스가 정치적으로 (또 신체적으로도) 성장한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는 동부,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맡아 3두 정치를 순탄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20년 전의 3두 정치에서도 서부를 차지한 카이사르가 결국 승리하지 않았던가?

 

영화 <아저씨>에서는 내일 사는 자가 오늘만 사는 자에게 죽는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상황에 만족하는 자가 만족하지 않는 자에게 죽는다.’ 안토니우스는 3두 정치에 만족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그렇지 않았다. 기원전 36년 그는 레피두스의 군대를 설득해 자기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손발을 제거당한 레피두스는 자연히 3두에서 떨어져나갔고, 남은 두 사람의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하지만 승부의 추는 급속히 기울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동갑내기로 절친한 친구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기원전 63년경~기원전 12)와 같은 뛰어난 참모들을 거느리고 한창 성장하는 중이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 데다 파르티아 전쟁에서도 패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가서 9개월 동안이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기원전 69기원전 30)의 치마폭에서 지냈다. 클레오파트라는 일찍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면서 이집트에 갔을 때 그의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그것마저 옛 상관을 본받으려 했던 걸까?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였다. 아직 미정복지로 남아 있던 이집트를 향해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고(당시 이집트는 사실상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형식적으로는 속주가 아니었다), 여기서 승리하면 안토니우스는 저절로 제거될 것이었다.

 

기원전 31년 가을에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함대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는 그리스 부근의 악티움에서 해전으로 맞섰다.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클레오파트라는 뱃머리를 돌려 달아났고,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뒤쫓아가 그 배에 올랐다. 지휘관이 없는 전투의 승패는 뻔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별다른 접전 없이 안토니우스 군대의 투항을 받아들여 악티움 해전을 승리로 끝냈다.

 

이듬해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까지 추격해왔다는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영욕에 찬 삶을 마감했다. 클레오파트라도 며칠 뒤에 연인의 뒤를 따랐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대가 끊겼다. 역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수천 년에 이르는 이집트 왕국의 역사도 끝났다는 사실이다. 메네스 왕이 첫 이집트 왕국을 세운 이래(32쪽 참조) 3000년이 조금 넘는 시점이었다.

 

 

영웅의 싹은 청년기에 만개하는 걸까?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을 원정한 것과 같은 서른셋의 나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세계 제국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사실상의 제국 로마를 명칭상으로도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기원전 27,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월계수관과 방패, 그리고 군대 지휘권을 포함해 로마와 속주들의 모든 지배권을 받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신분과 호칭이다. 그는 사실상의 황제였으나, 참주를 싫어하는 로마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원로원은 그에게 프린켑스(princeps, ‘최고 시민’)라는 공식 직함을 헌정하고, 아울러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분’)라는 존칭을 바쳤다그가 받은 정식 명칭은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Ch. Imperator임페리움(Imperium: 명령권 혹은 행정권)의 소유자라는 뜻으로, 원래 정복의 임무를 완수한 사령관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황제라는 직함이 된다(영어의 emperor는 여기서 나왔다). divi filius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Caesar는 새로 바뀐 그의 이름이다. 원래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는데,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상속자가 된 뒤 그는 재빨리 자기 이름에다 그의 이름을 합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또한 그의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이름은 7월의 이름이 되었고(July는 율리우스Julius의 영어식 표현이다), 아우구스투스는 8월의 이름이 되었다(8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August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들 부자 덕분에 원래 7월에서 10월까지의 이름들은 오늘날 모두 두 달씩 뒤로 밀려 9월에서 12월까지의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원래 로마의 달력은 3월부터 시작했으므로, 그들 때문에 7월이 9월이 된 것은 아니다).

 

드디어 로마는 제국이 되었다. 이 시기의 제정을 원수정(prinspitus)이라고 부르지만,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기 위해 명칭을 그렇게 붙였을 뿐 사실상은 제정이었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틀 내에 머무른 시대에 어울리는 정치 체제가 공화정이었다면,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로마에 어울리는 정치 체제는 바로 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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