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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순자 - 제자백가를 통솔했던 위대한 유학자, 순자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순자 - 제자백가를 통솔했던 위대한 유학자, 순자

건방진방랑자 2022. 3. 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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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를 통솔했던 위대한 유학자, 순자

 

 

제사를 지낼 때 제사에 참여한 여러 사람을 대표하여 고인에게 술을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좨주(祭酒)라고 부릅니다. 가장 연장자이거나 가장 신망이 높은 사람만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자(荀子, BC 298년경~BC 238년경)전국시대의 모든 지식인들을 대표하던 좨주의 자리에 무려 세 번이나 올랐던 대단한 인물입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흔히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립니다. 글자 그대로 제자백가는 여러 명의 선생들과 수많은 학파라는 뜻이지요. 중국 동방의 큰 나라였던 제()나라는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 수도 근처에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는 일종의 거대한 인문사회 연구소를 세웁니다. 그래서 이곳을 보통 직하학사(稷下學舍)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나라는 이곳에 참여한 지식인들에게 그 대가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펼치려던 지식인들이 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의 직하학궁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직하학궁에서 거의 모든 쟁점이 논의되고 토론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국가에서 세운 연구소이긴 했지만, 국가를 부정하는 아나키즘(anarchism)을 신봉하던 사상가들이 여기로 모여들 정도였으니까요. 앞에서 다뤘던 맹자도 이곳을 거쳐갔던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맹자를 읽어보면 맹자가 제나라 군주 선왕(宣王)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이 선왕이 직하학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제나라의 막강한 군주였습니다. 선왕을 만났을 때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옹호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별다른 효과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던 선왕이 보았을 때, 맹자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꿈과 같은 주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선왕은 맹자를 매우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맹자를 존경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왕은 맹자처럼 이상적인 주장을 하는 사상가도 포용한다는 인상을 다른 지식인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많은 지식인들이 안심하고 직하학사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자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는 직하학사의 모든 지식인이 인정하던 당대의 저명한 사상가였습니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했던 것과 달리,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던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주장만큼 인간의 허영심을 쉽게 충족시켜주는 관념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고상한 종족이라는 인상을 주니까요. 이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던 순자의 생각은 그가 죽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강하게 거부됩니다. 특히 후대 사람들이 맹자를 공자와 묶어서 공맹(孔孟)’이라 부르면서부터 순자는 아예 이단적인 유학자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향을 가속화시킨 사람들은 바로 중국 송대의 주희를 대표로 하는 성리학자들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한번도 공자와 공자의 사상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위대한 사상가 중 최고의 자리를 항상 공자를 위해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순자는 맹자와 다른 방식으로 공자의 사상을 이해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비극은 맹자 식의 공자 이해가 그 이후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맹자와 순자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순자가 맹자보다 여러 면에서 탁월했음을 인정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순자를 동양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라고 이야기하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의 위대한 종합자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순자도 제자백가의 모든 사유 경향들을 정합적(整合的)으로 체계화한 종합자였습니다. 이는 그가 직하학사를 대표하던 일종의 대학 총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직하학사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면 그가 나서서 그 논쟁을 조율하고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순자의 사상은 모든 사상가가 납득할 정도의 정합성과 체계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직하학사의 좨주를 세 차례나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순자는 모함 때문에 화려했던 제나라의 생활을 뒤로하고 초()나라로 정치적인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사상을 정리합니다. 순자의 체계적인 사상은 지금 순자(荀子)를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순자 역시 맹자와 마찬가지로 공자의 사상을 새롭게 체계화함으로써 다시 살리려는 의지를 가졌던 유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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