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눈이 된 독일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쟁탈전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정복지를 식민지로 만들었을까? 유럽이 해외 진출을 처음 시작했던 15세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어 타협을 이루었고 그 타협을 주재한 사람은 로마 교황이었다(28~29쪽 참조). 이제 그런 주재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열강은 어떻게 서로의 식민지를 승인하고 타협을 이루었을까? 더구나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에서는 전쟁을 불사했으면서도 묘하게도 그 다툼을 유럽으로 연장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모처럼 짜놓은 유럽의 판도를 깨지는 않은 것이다. 전쟁과 타협이 어우러지는 이런 고도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축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비스마르크가 식민지 개척에 열성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또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몹시 바빴다는 점이다. 그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에 마치 정신병자처럼 매달렸다. 심지어 그는 프랑스가 얌전히 북아프리카에 몰두하는 게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프리카 분할이 진행되면서 열강이 서로 큰 충돌을 벌이지 않고 타협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절충하는 복잡한 외교 활동이 있었으며, 그것의 총지휘가는 비스마르크였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의 관계는 마치 복수전을 꿈꾸는 패자와 더 이상 싸우기 싫다며 버티는 승자의 관계와 비슷했다. 1871년 프로이센에 패하고 본의 아니게 프로이센 왕국을 독일제국으로 만들어주는 데 일등공신이 된 프랑스는 이후 여러 차례 독일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으나 비스마르크는 좀처럼 도전을 받아주지 않았다. 전쟁을 부를 만한 상황에서 전쟁을 피하려면 피흘리지 않는 다른 전쟁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요즘 같으면 스포츠가 대신하겠지만, 19세기 후반의 비스마르크는 유럽 전체를 무대로 스포츠에 못지않은 흥미로운 대체 전쟁을 벌였다. 그것은 바로 외교전이었다.
비스마르크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프랑스였다. 비록 전쟁에서는 이겼으나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 게다가 프랑스는 전통에 빛나는 강국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1873년에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다(마침 세 나라는 모두 제국이었으므로 그것을 삼제동맹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태생(민족과 언어)도 같았고 이해관계를 같이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는 프랑스가 접근하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동맹에 끌어들인 것이었으므로 분란의 여지가 있었다. 과연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의 후속 조치로 체결된 베를린 조약에서 러시아는 불만을 품고 동맹을 탈퇴하려 했다(전쟁에서 피 흘린 것은 러시아였는데 팔짱끼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발칸을 지배하려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비스마르크의 활약이 펼쳐지는 것은 이때부터다. 그는 혼자 동분서주하면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어르고 달래, 만약 어느 지역에서든 전쟁이 벌어질 경우 세 나라끼리는 최소한 중립을 유지하자는 약속을 성사시켰다. 게다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에 밀려난 이탈리아가 볼멘 목소리로 호소해오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새로 맺었다. 프랑스의 적은 독일의 친구, 이 간단한 원칙을 그는 최대의 철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 강경에 밀린 철혈 19세기 후반 유럽 국제 정세의 열쇠는 독일제국이 쥐고 있었고, 독일제국의 열쇠는 빌헬름 2세(왼쪽)와 비스마르크(오른쪽)가 쥐고 있었다. 신생 독일제국의 국력을 증진시키려는 의도는 두 사람이 똑같았으나, 그 방법은 정반대였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피하고 외교에 주력한 반면, 빌헬름은 해외 식민지 분할에 독일이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노회한 철혈재상이 패기의 강경 황제에게 밀려났고, 이것으로 유럽의 판도는 서서히 전쟁의 조짐을 품게 된
다. 그 결과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어쨌든 1871년 이후 2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유럽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유럽에서는 작은 전쟁 한 번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비스마르크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고 그렇게 노련했던 그도 젊은 패기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1888년 스물아홉 살에 독일 황제가 된 빌헬름 2세(1859~1941, 재위 1888~1918)는 할아버지인 빌헬름 1세와 달리 비스마르크에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비스마르크처럼 프랑스 공포증에 걸리지도 않은 데다 독일을 강대국으로 키우려면 해외 식민지 경쟁에 적극 뛰어들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빌헬름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옳았으나 문제는 역시 프랑스였다. 황제의 신임을 잃은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 프랑스는 러시아에 접근했고, 비스마르크만 믿은 러시아도 프랑스에 접근했다. 결국 젊은 빌헬름의 장점은 늙은 비스마르크의 단점이었고, 빌헬름의 단점은 비스마르크의 장점이었던 셈이다.
독일의 급작스런 태도 변화는 유럽 세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프랑스에 이어 그동안 고립을 유지해오던 영국마저도 자극을 받았을 정도다. 사실 영국은 세계 분할에서 프랑스까지는 파트너로 인정해도 독일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두 나라가 누비기에도 아프리카는 이미 비좁아진 판인데 여기에 독일까지 뛰어든다면 입이 너무 많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아프리카는 이미 분할이 완료되어 있었으므로 더 이상의 분할은 곧 재분할이 될 것이고, 재분할은 곧 전쟁을 뜻할 터였다.
파쇼다 사건으로 관계를 호전시킨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 영국-프랑스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협상의 내용은 영국의 이집트 지배를 허락하는 대신 프랑스는 모로코를 차지한다는 것이었는데, 누가 봐도 독일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마침 빌헬름은 당시 모로코를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은 3년 뒤 러시아와도 협상을 성립 시켜 계속 독일을 따돌렸다. 10여 년에 걸쳐 프랑스와 러시아, 영국과 프랑스, 영국과 러시아의 동맹이 차례로 맺어짐으로써, 원래는 서로 앙숙이던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역사상 처음으로 삼국협상이라는 동맹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영국-러시아의 우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처음이고, 프랑스-러시아의 동맹은 18세기 중반 7년 전쟁 이후 처음이다.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은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사실 영국은 백년전쟁 이래 프랑스와 계속 크고 작은 다툼을 벌였지만, 경쟁 관계였을 뿐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영국은 앙주 왕조시대, 더 멀리는 정복왕 윌리엄 시대부터 프랑스와 불가분한 관계를 이루어왔다(실제로 16세기까지 영국 왕실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 시대에 셰익스피어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영어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다), 영국에 있어 프랑스는 미워도 낯익은 나라였다. 그러나 영국에 있어 독일은 이질적이었고, 또 그만큼 위협적인 상대였다】. 목표는 바로 얼마 전에 형성된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동맹에 대항하려는 것이었다.
유럽에 특별한 강대국을 두지 말자는 빈 체제의 구도는 19세기 내내 대체로 지켜졌으며, 비스마르크 체제는 그 가장 탁월한 계승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이 되면서 그 구도는 절반만 유지된다. 절대적인 강국은 없었으나 이제는 유럽 전체가 두 편으로 갈리게 된 것이다. 한편은 시민혁명을 통해 시민사회의 전통을 쌓은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하고, 다른 한편은 그런 역사와 전통이 부족하고 식민지 분할에서 불만이 많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다. 조만간 이 이질적인 두 집단이 불협화음을 낼 것은 뻔했다. 결국 전쟁이 없었던 비스마르크 체제는 폭풍 전야의 침묵이었던 것이다.
▲ 삼두 체제 균형을 위한 최소한의 정족수는 셋이다. 솥의 발이 세 개여야 설 수 있다는 정립(鼎立)의 원리는 동양의 역사적 경험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다. 그림은 비스마르크의 작품인 삼국동맹의 삼두, 즉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세 황제를 보여준다. 제국의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시기에 세 황제가 모였으니 수구의 대명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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