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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5장 삼위일체 논쟁 - 삼위일체론의 정체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5장 삼위일체 논쟁 - 삼위일체론의 정체

건방진방랑자 2022. 2. 2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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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의 정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1:14)는 이야기도 예수라는 특수존재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일반이 될 때에는, ‘인간 = 예수 = 하나님의 등식이 전개될 수 있는 근거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분위기는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이 자유롭게 허용되었고, 많은 사람이 그러한 방식으로 케리그마를 이해하고 다양한 운동과 창조적인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결국 이단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이즘의 유일신론적 사유의 틀은 인간과 하나님의 횡적인 연대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강하게 거부한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설정은 궁극적으로 종적인 일방성이다. 그 일방성의 방향은 인간에서 신에로의 방향이 아니라, 철저히 신에서 인간에로의 방향이다. 따라서 예수의 신성을 말한다 해도 그것이 곧 인간의 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비약될 수는 없다.

 

여기에 삼위일체론의 곤혹스러운 과제상황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인간과 하나님의 횡적 연대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신민에 대한 황제의 절대적 군림의 권위를 얻고자 하는 콘스탄티누스의 입장에서 보면 아리우스의 인간주의적 해석은 기독교의 초월적 유일신론의 강점을 희석시키는 위험한 이론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리우스사상에 내포된 신비주의적 평등관을 두려워했다. 물론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도 마찬가지였다.

 

마태복음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로 끝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28:19).

 

 

그리고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다음과 같은 사도의 축도(apostolic benediction)로 끝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3).

 

 

이미 1세기 중엽부터 말에 걸쳐, 그러니까 아주 초기의 기독교교회의 리터지(liturgy, 典禮)나 기도에서 이미 삼위일체론의 원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아버지 아들 - 성령’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 - 성령이라는 개념이 한 문장에서 병렬되어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AD 100년경 전ㆍ후로 성립했다고 하는 요한복음은 이미,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다른 이름인 보혜사(保惠師, Parakletos)라는 삼자의 틀 속에서 전체적인 이론구조가 갖추어진 복음이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란 원래 법정변호인을 뜻하는 말인데, 아버지의 법정에서 인간을 변호해주는 존재라는 뜻으로 예수의 다른 면모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법정에서의 고소인, 검사는 디아볼로스(diabolos), 즉 악마(devil)요 사탄(Satan)이다. 보혜사는 예수의 부재시에는 예수를 대신하여 인간을 진리로 이끄는 영적 존재이다. 그리고 보혜사의 오심은 곧 예수의 재림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나의 요한복음강해388~9, 402, 40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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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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