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본거지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터키 하란평야에 우르파라는 매력적 도시가 있다. 예수시대에 이 도시는 오스로외네왕국의 수도였으며 에데사라고 불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활약한 카이사레아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최초의 기독교 교회사를 썼는데, 그 속에서 그는 에데사의 왕이 당대의 살아있었던 예수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에데사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국가였다. 이 사실은 도마복음서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지도를 펼쳐놓고 메소포타미아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보자!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라는 말은 희랍어로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인데 그 두 강은 아시다시피 티그리스강(Tigris)과 유프라테스강(Euphrates)을 지칭한다. 바그다드는 이 두 강이 가장 가깝게 오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메포소타미아는 현재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에 걸쳐 있다.
우리는 예수의 활동지인 갈릴리(Galilee)하면, 이상하게도 옛 강원도 ‘감자바위 동네’와 같은 인상을 지니기 쉽다. 왜냐하면 복음서(福音書)는 후대 초기기독교의 기술이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루살렘 중심의 가치관을 지닌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난설화(Passion Narrative) 자체가 갈릴리 시골에서 놀던 촌사람 예수가 대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어떤 직선적 시간 라인을 그리고 있고, 예수복음의 핵심인 수난(Passion)이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에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요한복음은 이런 직선적 시간라인을 파괴한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보다 리얼하게 생각해보면 예수운동(The Jesus Movement)의 본거지는 갈릴리이지 결코 예루살렘이 아니다. 예루살렘은 오히려 그의 생애에서 매우 마이너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해프닝의 배경일 뿐이다. 예루살렘성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면 갈릴리는 화려한 성전건물도 없는 초라한 시골이 되고 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지역 문명의 발상지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였다.
이스라엘 문명도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도 최근 이라크전쟁의 집중 피폭지 중 하나였던 바스라 항구 근처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유프라테스 상류지역인 하란(Haran)평야에서 살다가 세겜, 벧엘을 거쳐 이집트로 갔다가 브엘세바(Beer-sheba)에 정착한 인물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태어났고, 갈릴리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장성하여 예수운동을 펼쳤다. 그 갈릴리는 남쪽의 유대와는 비교적 격절된 문명지였으며 그 아이덴티티는 역사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앗시리아, 바빌론, 소아시아문명권과 더 밀착되어 있었다. 더구나 예수가 태어나기 3세기 전에는 알렉산더대제가 이 지역을 헬라화하면서 이 지역은 헬레니즘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였다. 갈릴리바다 주변에도 헬라식 폴리스도시가 건설되었으며 그것은 페니키아, 남부 시리아, 데카폴리스(Decapolis)【성서 이름은 ‘데가볼리’인데, 갈릴리바다 동남쪽으로 형성된 10개의 희랍식 폴리스도시를 말한다】, 북부 팔레스타인 지중해 해안도시들과 연계를 이루고 있었다. 신전, 극장, 학교, 스타디움, 경기장, 목욕탕, 주랑 있는 아고라(시장) 등등의 헬라화된 도시 풍경은 갈릴리 지역의 다반사였다. 복음서(福音書)에는 예수가 극장을 가거나 목욕을 엔조이하거나 하는 장면이 안 나오기 때문에, 그가 비교적 토착적 하층민의 삶과 밀착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지만, 예수가 산 문명의 환경과 지적 풍토는 당시 그레코로만 사회에 있어서 최첨단의 개방적 분위기였다.
갈릴리는 우선 인종적으로 복잡했으며 언어도 유대지역과는 달랐다. 따라서 이방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북쪽의 소아시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트랜스요르단, 다마스쿠스 지역과 남쪽의 사마리아, 유대지역의 완충지대였기에 예루살렘에 대한 예속감이 없었다. 갈릴리에는 수도도 없었고, 왕도 없었고, 성전도 없었으며, 제사장들의 하이어라키(hierachy, 계층제)도 없었다. 어떤 초월신이나 왕에 대한 충성심이란 갈릴리사람들의 덕성이 아니었다. 갈릴리사람들은 로마에게도, 헤롯에게도, 예루살렘의 성전 이스태블리쉬먼트(establishment, 질서, 기득권세력)에게도 충성을 표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Burton L. Mack, The Lost Gospel 62). 이런 배경 속에서 소피스트들과 같은 헬라화된 지식인들이 대중운동을 리드하고, 많은 코이노니아이(koinoniai) 소규모 친목단체들이 활약하고, 다양한 희랍철학 유파사상과 지중해 문명권의 모든 신화적 사상의 홍류가 휩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수라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사상운동가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접경지에 있는 이 지중해 해변도시는 헤롯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에 의하여 유대왕으로 책봉되자, 이에 감읍하여 이 도시를 지어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했기 때문에 카이사레아 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BC 22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찬란한 도시는 예수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가 예루살렘보다도 훨씬 더 당대 문명의 첨단 이기를 향유한 편리하고 아름다운 도시였기 때문에 로마총독의 관저가 여기 있었다. 예수를 재판한 빌라도 총독도 이곳에 상주하였고 유 같은 큰 명절에만 예루살렘을 잠깐씩 다녀갔다. 극장, 신전, 원형경기장, 2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전차경기장, 고급 목욕탕, 총독관저, 수로시설 등이 지중해 해변을 따라 펼쳐지는데 예수시대의 삶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의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예수시대 유적으로서 가장 리얼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꼭 가볼만한 곳이다. 베드로가 설교를 행한 곳이며, 바울이 구류된 곳이기도 하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f1.4c.)는 이곳의 주교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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