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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해탈과 열반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해탈과 열반

건방진방랑자 2022. 3. 15.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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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과 열반

 

 

이 고통스러움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그 벗어남이라는 말을 해탈이라는 말로 바꾸어보자! 해탈이라는 말은 인도사상(베다/우파니샤드)에 있어서는 분명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우주론적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지만, 초기불교경전들에서 이 해탈이라는 용어는 반드시 그러한 엄밀한 의미맥락에서만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해탈은 우리를 묶고 있는 속박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의미며, 그것은 번뇌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심경, 즉 심적 상태를 의미한다. 해탈은 우주론적인 맥락에서 보다도 그러한 소박한 심리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맥락에서 흔히 쓰였음을 초기경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물론 해탈의 본래적 뜻은 이 윤회의 세계로 다시 진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체(一切)가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때로 부처는 일체(一切)가 불타고 있다라고 표현할 때가 있다. 부처는 대각 후 어느날 천여 명의 비구들과 함께 가야지방에 있는 가야시사산에 오른 적이 있다. 이때 건너편에 있는 산에 산불이 났다. 제자들은 산불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저 산이 불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불타고 있는 것은 저기 저 산만이 아니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그대들의 눈이 불타고 있다. 일체가 불타고 있다.”

 

마하박가에는 다음과 같은 설법이 기록되어 있다최봉수 옮김, 마하박가1, pp.103~5..

 

 

비구들아,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비구들아,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눈이 불타고 색들이 불타고, 안식이 불타고 안촉이 불타고, 안촉에 기대어 발생한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이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는가? 탐욕의 불로 타고 노여움의 불로 타고 어리석음의 불로 타고, 출생ㆍ늙음ㆍ죽음ㆍ슬픔ㆍ눈물ㆍ괴로움ㆍ근심ㆍ갈등으로 불탄다.

귀가 불타고 소리들이 불타고……

코가 불타고 냄새들이 불타고……

혀가 불타고 맛들이 불타고……

몸이 불타고 촉감들이 불타고……

의지가 불타고 법들이 불타고……

탐욕의 불로 타고 노여움의 불로 타고

어리석음의 불로 타고,

출생ㆍ늙음ㆍ죽음ㆍ슬픔ㆍ눈물ㆍ괴로움ㆍ근심ㆍ갈등으로 불탄다.

 

 

바로 우리가 열반(涅槃, nirvāṇa)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열반, 즉 니르바나는 니로다(nirodha, : )와 같은 어근의 말이다. 우리의 눈이 타고, 귀가 타고, 코가 타고, 혀가 타고, 몸이 타고, 의지가 타는 것은 바로 탐욕(貪欲)과 진에(瞋恚), 우치(愚癡), 즉 탐ㆍ진ㆍ치의 삼독(三毒)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삼독(三毒)ㆍ삼화(三火)가 지멸(止滅)한 상태를 우리는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열반이란 본래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존재론적인 완벽한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열반이라는 개념을 그러한 존재론적 개념으로 심화시킬 때 존재의 멸절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므로 유여열반(有餘涅槃)이니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니 하는 따위의 구분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원시경전에는 열반이라고 하는 이상향, 그 자체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논의가 희소하다. 그리고 물론 유여열반이니 무여열반이니 하는 이원적 설법도 부파불교의 말류에서 생겨난 것이며, 전혀 싯달타 자신의 논의가 아니다. 총체적으로 조감하여 본다면 후대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야말로 원시불교의 정통사상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水野弘元, 原始佛敎(京都 : 平樂寺書店, 1981), p.187. 마쯔모토 시로오(松本史朗)씨는 여래장론을 비판한 문제의 작, 연기와 공에 실린 해탈과 열반이라는 논문 속에서 열반의 뜻이 전통적인 불을 끔,’ ‘소멸이라는 뜻 이외로 덮임을 제거하다.’ ‘풀어지게 하다.’ ‘이탈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nibbuta, parinibbuta). 후자의 의미맥락으로 열반의 뜻을 풀어야만 원문들이 소기하는 의미가 명료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쓰모토씨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까닭은 열반의 이러한 의미 배경에는 아론(我論)이 깔려있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다. 즉 실체적으로 아트만(ātman)이 전제되어 있고, 그 아트만을 가린 덮임을 제거하고, 그 아트만을 비아트만에서 이탈시키는 것이 열반이요, 해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열반과 해탈을 긍정하기 위하여 벌리는 논점이 아니다. 열반과 해탈이라는 말 속에 숨겨져 있는 왜곡적인 요소, 불교와 대립한 인도전통철학이나 쟈이나교 등의 아론이 초기승단내부로 침투하여 원시불전에 반영되어 있는 지극히 비불교적인 요소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열반과 해탈을 비불교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쯔모토씨의 논지가 과격하여,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주장의 본의는 매우 명쾌한 것이며 내가 생각하는 근본불교의 모습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松本史朗의 문제작, 연기와 공慧謜교수에 의하여 번역되었다(서울 운주사, 1998). 원작은 松本史朗, 緣起, 如來藏思想批判(東京 : 大藏出版, 1998), p.198..

 

 

 바나라시 간지스 강의 화장터로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지고 있는 마니카르니카 가트(Manikarnika Ghat). 시체들이 불타고 있다. 죽음과 삶이 항시 공존하고 있다. 접근촬영이 허용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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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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