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연기와 종교적 사실
연기ㆍ인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매우 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인과)라는 말이 우리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의 대각의 케리그마로 들리지 않고 진부한 속언처럼 시시하게 들리는 데는 크나큰 원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연기적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금 말하는 ‘우리’는 역사적 우리다. 그 우리는 항상 시간성 속에 있는 우리다. 그것은 연기된 우리인 것이다. 이 역사적 우리를 특징지우는 것은 근대적 시민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우리에게는 암암리 교육을 통해서 받은 공통된 세계관이 있다. 그 세계관이란 우리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방법에 관한 것이다. 그 인식방법을 우리는 과학(Science)이라고 부른다. 과학은 스키엔티아(scientia)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지식(Knowledge)이란 뜻이다. 즉 과학이란 이 세계, 이 우주, 이 인간에 대한 앎,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앎의 방식이다. 과학은 지식이요, 지식은 앎이요, 앎은 깨달음이다. 이 과학이라는 깨달음이 보편화된 사회를 우리는 근대 사회라고 부르고 있고 그 근대사회에 사는 사람을 근대시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근대시민들이 교육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형성한 과학적 세계관의 특징이란 바로 인과적으로 사물을 파악한다는 데 있다. 과학은 사물을 아무렇게나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든 현상의 운동ㆍ활동체계가 반드시 어떠한 원인에 의하여 연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결정지우는 보편적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보편적 법칙을 우리는 과학적 법칙(scientific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법칙을 떠난 이 세계 이해방식을 미신이라든가, 초험적인 것으로 괄호에 넣거나 배척하거나 한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 어떻게 죽었나? 그는 자기의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아 로마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죽었다. 어떻게 죽었나? 양 손바닥과 발목에 큰 못이 박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출혈이라는 현상이 생겼다. 그래서 순환계의 장애가 초래되고 심장의 박동이 멈추었다. 그리고 몸은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패한 사체를 까마귀가 쪼아먹기 시작했다, 운운… 그런데 이러한 사태를 연하여 다시 살아난다는 결과는 초래되지 않는다. 우리가 과학적 인과관계 즉 과학적 연기를 받아들이는 한에 있어서는 이러한 종교적 사실은 연기의 사실로서 인정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충돌을 일으켰다. 그것이 우리가 목격한 르네쌍스시대의 개화백경(開化百景) 아닌 부흥백경(復興百景)이었다.
▲ 이 사원은 이슬람 마스지드(모스크)인데도 불구하고 힌두 모티프의 석주들로 가득차있다. 27개의 힌두사원을 파괴하고 그 석재를 이슬람 사원의 건자재로 그냥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양대 종교의 충돌과 융합의 현장이랄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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