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12.4. 환조와 본존불에 대해
여기 환조(丸彫)라는 말은 부조(浮彫)와 대비되어 쓰이는 미술사의 용어인데, 그것은 좌우앞뒤 4면을 모두 조각한 통조각 작품이라는 뜻이다. 초기불상들을 잘 살펴보면 환조같이 보이는 것도 실상은 뒷면이 처리가 안 된 부조(relief)일 경우가 많다. 벽에 조각해 들어갈 때는 환조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간다라ㆍ마투라의 불상들이 모두 부조작품에 속하는 것이며 환조는 그 이후의 발전이다. 벤자민 로울랜드 지음, 이주형 옮김, 『인도미술사』(서울 : 예경, 1999), p.125.
그리고 석굴암의 본존(本尊)의 명호(名號)에 관하여 여러가지 논의가 있으나 이 본존은 그냥 소박하게 석가모니 부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황수영(黃壽永)선생은 석굴암 본존이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모든 자료가 선생 자신의 관념적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꿰어 맞춘 방계적 자료에 불과하다는 혐의를 모면하기 어렵다. 그리고 석굴암을 애써 정토신앙의 표현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한 주장은 오히려 정토신앙의 전통이 강한 일본불교학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방계적 자료에 의하여 석굴암 본존이 아미타불임을 역설하는 것은 석굴암을 창건한 사람들의 의도를 기복신앙적인 발원에 귀속시킬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석굴암의 격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십대 제자를 거느린 역사적 싯달타의 32상 색신(色身, rūpa-kāya)이며, 마귀를 누르고 성도한 법신불의 모습이며, 관세음보살과 같은 세상의 고통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수없는 보살들의 보신불이다. 석굴암은 이러한 삼신을 총체적으로 구현한 불법의 완정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유형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며 특정 종파의 성격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본존 뒤에 있는 관세음보살도 아미타불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그려졌다면 대세지(大勢至) 보살과 함께 협시되는 형태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정토사상과는 무관하게 이미 AD 1세기부터 형성된 관음사상의 독자적인 표현일 뿐이다.
선대 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엄밀한 비판적 검토가 요청된다. 황수영선생의 주장은 黃壽永 編著, 安章憲 寫眞, 『石窟庵』, pp.29~33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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