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 속에서의 지각
둘째, 맑스는 포이어바흐를 비롯한 유물론자들이 ‘지각이나 감성, 즉 대상을 단순히 지각ㆍ직관ㆍ감각으로만 파악했다’고 비판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지각을 단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관조하는 행위로만 간주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생각은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제시된 것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관념론자들은 대상을 주체의 관념 속에서 정의합니다. 이에 대해 포이어바흐는 “관념론자들은 사물을 더욱더 잘 보기 위해 인간의 육체에서 눈을 빼버렸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그대로 뒤집어 “좀더 잘 보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눈을 갖고 개념을 없애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합니다. 그는 대상을 눈에 비치는 대상, 직관되는 대상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지요.
그러나 맑스에 따르면 지각이나 감성은 대상과 목적을 갖는 ‘활동’이요 ‘실천’입니다. 지각이란 대상을 그저 수동적으로 비추기만 하는 거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실천적 맥락에 따라 대상은 다르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지터」(The Visitor)의 예를 들어 봅시다. 중세의 영주와 시종이 20세기로 날아와서 처음 한 행동이 지나가던 자동차를 악마가 보낸 괴물로 알고 처치하는 것이었다고 했지요? 처음에 시종이 덤벼들었다가 폭발음에 놀라서 도망칩니다. 그러나 영주는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어서인지 용감하게 싸워서 그 괴물을 무찌릅니다. 운전수는 도망을 가고, 시종은 영주의 빛나는 용기와 힘에 다시 한번 감복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예지요. 그러나 이 극단적인 예를 통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중세인들로선 그것이 자동차라고 인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서양인을 신의 사자라고 생각한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원주민들도 마찬가집니다. 부시맨이 발견한 콜라병이 과연 콜라병이겠습니까? 중세의 신부들이 보기에 해는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는 거지요. 지구가 돈다는 건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거고 말입니다.
요컨대 실천적 맥락과 무관하게 어떤 대상을 지각하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양식이나 일상적인 실천, 혹은 목적을 갖는 실천 속에서 사물을 지각하게 마련이라는 거지요.
▲ 사우스 피트스톤의 광부들
루이스 하인(Lewis W. Hine)의 사진 「펜실바니아, 사우스 피트스톤의 광부들」이다.
사회학자 출신의 사진작가인 루이스 하인은 노동자와 노동하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데 평생을 바쳤다. 사진을 유심히 보면 광부들의 대부분이 열 살이나 될까말까 한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진집을 보면 정말 대여섯 살 된 아이들이 공장에서, 혹은 실내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이 많다. 맑스가 공장 감독관 보고서에서 인용한 사실을 하인은 사진에 담아 보여준다.
위 사진의 날짜는 1911년이다! 20세기에 들어와 10년이 지났어도, 아이들은 아직도 광산에서 탄을 캐야 하는 상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합리성이 극도로 발달하여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된 이 자본주의적 근대 세계와 배고프면 수렵ㆍ채집을 하고 배부르면 게으름을 피우며 느긋하게 살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미개한 ‘원시 사회’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진보’한 사회고 어떤 것이 더 ‘발전’한 사회일까? 정말 역사는 발전과 진보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어쨌든 노동자나 노동하는 아이들을 다룬 루이스 하인의 사진들은 끔찍한 아동노동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증명함으로써,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법안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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