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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3부 독일의 고전철학 : 근대철학의 재건과 ‘발전’ - 3. 헤겔 : 정점에 선 근대철학, ‘철학의 종말’, 근대철학의 종말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3부 독일의 고전철학 : 근대철학의 재건과 ‘발전’ - 3. 헤겔 : 정점에 선 근대철학, ‘철학의 종말’, 근대철학의 종말

건방진방랑자 2022. 3. 25.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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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종말’, 근대철학의 종말

 

 

그렇지만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 있었던 헤겔로선 또 다른 딜레마를 절감하게 됩니다. 진리란 스스로 돌아보며 자기가 갖고 있는 기준을 계속 정정해 가는 과정이라는 헤겔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헤겔이 생각해낸 이 진리의 기준 역시 이후 정정되고 폐기될 수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헤겔 자신이 제시한 진리의 기준은 초역사적으로 타당하다고 하는 순간, 진리의 기준이 정정되어 가는 과정을 통찰한 헤겔 자신의 진리 개념은 장벽에 부닥칩니다.

 

이는 논리적인 난점이지만, 사실 진리 개념에 대한 입론을 제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난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기준 자체의 정정 과정을 파악하는 입론의 현실성이요 효과니까요. 그러나 확고한 진리를 추구하는 근대적 문제설정 속에 있던 헤겔에게 이 난점은 결코 방치되어선 안 될 것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즉 그는 진리의 정정과정이라는 자신의 진리기준만은 절대적 진리의 자리에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방법은 어떤 것인가? 헤겔에게 그건 매우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진리와 지식의 변증법절대정신의 자기의식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목적론적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헤겔 자신의 주장이야말로 절대정신의 실현을 목격한 지식이라고 한다면, 예컨대 그 과정의 종착점에 이른 지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정될 이유가 없는 절대적 진리가 됩니다. 절대정신이 실현되는 과정을 다 목격한 사상, 따라서 절대적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러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했습니다. 즉 헤겔의 지식이 형성된 당시야말로 절대정신이 실현되는 역사의 종착지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절대정신의 실현을 목격한 지식이란 주장이 통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제 그는 자기가 살던 시대를 절대정신이 완성되는 시대라고 정의하며, 프로이센 국가를 그 실현을 책임지는 국가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어떤 철학도 절대정신 완성 과정의 증인인 헤겔의 사상을 뛰어넘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철학은 종말을 고하게 된 것입니다! 단 헤겔의 사상 안에서만 말입니다.

 

그 결과 근대적 독단론의 비판인 진리의 지속적인 정정과정이란 명제는 헤겔 자신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정반대의 독단적 명제로 전환됩니다. 자신의 주장을 절대적 진리로 정립하기 위해 그는 역사마저도 완성켜 버린 것이고, “프로이센 국가 만세를 외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헤겔 자신에게 이르러선 자신의 명제가 반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서 진리의 기준이 형성되고 그에 따라 지식이 검사되는 게 아니라 헤겔의 진리 기준을 위해 역사가 완성이란 이름을 얻고 지식의 정정도 중지되는 그런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식과 진리의 변증법이라는 헤겔의 명제는 사실 두 가지 선택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종결된 지식, 완전한 진리란 없고 지속적인 정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절대정신 실현의 목적론적 과정을 통해 절대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중 전자가 갖는 비판적인 효과가 긍정적인 만큼 후자가 갖는 독단적인 효과는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헤겔로선 절대적 진리란 목적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목적론과 독단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엥겔스는 헤겔철학에서 완성된 체계와 혁명적인 변증법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며, 결국은 체계의 완성을 위해 변증법을 굴복시킨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선택지는 근대철학이 갖고 있는 근본적 딜레마를 다른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이란 결코 확인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진리란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거나(첫번째 선택지), 아니면 내가 곧 진리니라 14:6는 확인할 수 없는 선언을 반복하는 것(두번째 선택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정신의 철학은 어떤 철학적 효과를 가져왔을까요?

 

앞서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된다는 것은 보았습니다. 차이가 그처럼 환원되는 한, 모든 개체는 이제 그것이 갖는 보편성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개별성은 보편성으로 환원됩니다. 또한 모든 변화는 절대정신의 목적론적 운동에 포섭되며,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됩니다. 즉 변화는 목적으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연ㆍ사회ㆍ역사를 절대정신의 소외로 파악함으로써, 그것은 이제 관념으로 환원되게 됩니다. 헤겔철학은 절대정신의 자기의식이기에 그 안의 어떠한 내용도 절대적인 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환원 전체가 절대적인 것으로 됩니다. 완성된 근대철학, 절정에 선 근대철학은 자신이 포섭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는 전능한 이성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엥겔스의 말처럼, 이로써 철학은, 아니 최소한 근대철학은 종말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길레이, 플럼 푸딩이 위험하다(The Plum-Pudding in Danger)

헤겔의 역사철학은 목적론적 과정으로 발전한다. 목적론은 뒤에 나타난 사건으로 앞에 있었던 사건을 설명한다. 목적을 원인으로 간주한다. 사실 이렇게 설명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최종의 목적을 위해 있었던 것이 된다. 건축공이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자르듯이,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을 왕좌에 오르게 하기 위해 발생했던 것이고, 마리 앙트와네트는 프랑스 혁명을 위해, 아니 나폴레옹을 위해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라고 말했던 것이다! 물론 마리 왕비가 알지도 못했던 나폴레옹을 위해서 그랬을까만, 그것은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 역사가 개인의 의식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개인의 모든 것이 역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역사의 목적에 봉사한다. 자신이 알든 모르든 간에, 헤겔은 역사의 목적이 이성이기에, 이런 현상을 이성의 책략이라고 부른다. 영국 수상 피트와 나폴레옹이 지구를 난도질하고 있는 길레이(James Gillray)의 이 그림 또한, 절대정신이 국가를 지배하는 저 역사의 목적/종점을 위해 이성이 마련한 무수한 책략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에 따르는 침략과 강탈? 그것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죽어가는 사람들? 그것도 이성의 실현을 위한 희생이고, 이성의 책략 안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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