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과 주체철학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의 최대 업적이고 정신분석학이 존재하게 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근대철학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의식이란 개념은 철학의 영역에 들어오자마자 근대철학의 기초를 해체하는 강력한 작용을 합니다. 근대철학에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되었고, 통일성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투명한 존재였지요. 또한 주체가 모든 대상에 대해 판단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대상을 지배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요컨대 근대적 주체는 의식적 주체며, 통일성과 투명성ㆍ중심성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나 칸트에게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데카르트에게 세계가 확실한 것은 내가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칸트에게 세계나 진리는 (선험적) 주체 안에 있는 것이었고요. 그리고 이런 특징은 흄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자아’를 지각의 다발로 해체시킬 때조차도 그것은 지각이나 인상, 혹은 관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요. 그것들이 아무리 변덕을 부린다 해도 판단의 중심이 ‘자아’인 건 분명했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확실하게 반복될지는 모르지만, ‘자아’가 볼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의식이란 개념이 끼여들자마자 난감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첫째로 이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커다란 부분은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나’ 이외에 ‘생각하는 나’가 알지 못하는 ‘나’가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투명한 존재가 아닙니다. 신경증 환자의 행동이나 꿈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왜 하는지도 모르는 행동을 하고, 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장면이 의식이 잠든 사이에 눈앞을 스쳐갑니다. 따라서 내가 알지 못하는 행동을 내가 하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욕망을 내가 갖고 있다면, 그래서 무의식에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쳐져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게 됩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접근이 봉쇄되어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인 셈이지요. 또 앞서도 말했지만,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무의식은 의식에 영향을 끼치며, 의식이 사고할 수 있는 가이드 라인이기도 합니다. 즉 자아는 거시기와 초자아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 안에서 작동할 뿐입니다. 때로는 자아(의식)가 손을 쓸 수 없는 행동을 야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식이 몰두할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자아(의식)가 중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중심성을 상실하게 된 겁니다.
더 나아가서 초자아는 내 욕망이 아닌, 그러나 내가 따라야 할 무엇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분명히 ‘타자’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내 의사나 욕망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것,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도록 나를 설득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바로 초자아로서 내 안에 장착됩니다. 나의 성과 이름이 그렇고, 내가 해선 안 될 ‘짓’들이 그렇고, 내가 남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도덕과 가치가 그렇습니다.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는 이 ‘타자’가 오히려 내 안에 장착되어 나를 움직이는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존재는 단일하고 일관된 성격을, 통일성을 갖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간단히 말하면 ‘주체’는 서로 대립되며 상충하는 부분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거죠. 최소한 서로 대면하지 못하는 의식과 무의식, 서로 충돌하며 싸우는 거시기와 초자아로 나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체란 통일적인 중심이 아니라 매우 이질적인 복합체이고,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주체’란 (초자아라는) ‘타자’가 요구하는 규칙을 받아들여 행동함으로써 구성되는 결과물이란 것이지요. 이로써 근대철학의 지반이 해체되는 또 하나의 경로가 그려집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발견은 애시당초 철학의 영역 밖에서 행해진 것이었고, 철학적 주제와 관련된 것도 아니었지만 ‘주체철학’이라는 근대철학의 지반을 철저하게 허물고 깨뜨리는 발견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제공한 다양한 임상적 사례와 문헌적인 분석들은, 해체가 일단 시작되면 끝까지 밀고 가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 욕망은 잠들어 있을 때 옷을 벗는다.
위 그림은 델보(Paul Delvaux)의 「잠든 도시」(La ville endormie)다. 델보 또한 초현실주의 화가인데, 그의 그림은 대부분 가슴과 치모를 드러낸 여인들로 가득차 있다. 특히 그는 그리스나 로마 풍의 건물이 질서정연하게 세워진 도시, 하지만 어딘가 썰렁하고 텅 빈 듯한 도시와 옷을 벗은 여인들을 나란히 병치시키는 경우가 많다. 옷을 입은 여인들이 대개 도시를 향해 서 있다면, 옷을 벗은 여인들은 대개 도시를 등지고 서 있다. 옷 또한 문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반면 옷을 벗은 여인, 어떤 것도 감추지 않은 신체는 욕망을 억누르고 억압하는 문명의 껍데기를 벗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대비는 종종 루소를 연상시키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 같은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 이는 실제로 프로이트가 『문명과 그 불만』에서 쓰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잠든 도시를 옷 벗은 욕망이 걷고 있다. 잠든 도시와 잠들지 않는 욕망의 대비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니 잠들어 있을 때 비로소 욕망은 웃을 벗어던지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거라고 해야 할까? 그처럼, 꿈일까? 어둠과 교교한 달빛, 그리고 어둠으로 물든 신체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도 옷을 다 벗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옷을 입고 등징하는 남자야 문명의 일부분이라고 하자. 여인들은 옷을 반쯤 걸친 사람과 나뭇잎으로 옷을 삼은 사람만이 있다. 잠든 도시 안에서도 어느새 문명을, 옷을 다 벗어버릴 수 없게 된 숙명을 그리려던 것이었을까?
▲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초현실주의자들은 새로운 과거를 발견해냈다. 그들은 문학에서 욕망의 극한을 실험하고자 했던 사드를 역사의 망각 속에서 되찾아냈고, 그의 실험에 기꺼이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미술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예언자를 찾아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가 바로 그다. 르네상스기 중반의 플랑드르 화가였던 보쉬는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The Temptation of St. Anthony)이나 「쾌락의 정원」과 같은 삼면화에서 몽환적이고 ‘엽기적인’ 세계를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것은 당시 플랑드르 화파의 다른 사람들처럼 기독교의 성인이나 예수를 그린 것도 아니었고, 새로이 그림의 중앙에 등장하게 된 새 인물을 그린 것도 아니었다. 성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던 환상 안에서 사람의 형상은 두더쥐나 멧돼지, 새, 혹은 기이한 동물들과 뒤섞이고, 물고기를 타고 물 위를, 아니 하늘을 난다. 그뿐 아니라 「쾌락의 정원」의 유명한 지옥도에선 절단된 몸이 나무와 섞여 있고, 귀 두쪽과 나이프는 하나로 꿰어져 남근을 만들고 있으며, 옷 벗긴 신체를 꿰고 뚫고 때리는 극히 엽기적인 장면들이 정신없이 펼쳐져 있다. 굳이 정신분석에 심취한 눈이 아니어도, 그 중 많은 것이 성욕, 특히 변태적이라고 비난받던 성욕과 결부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긴 프로이트는 그리스까지 올라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예언자 혹은 족보의 화려한 시발점이나 중간 매듭을 찾으려는 욕망, ‘아버지’를 찾으려는 욕망 역시 정신분석가나 초현실주의자에게도 다르진 않았던 모양이다.
▲ 드러난 욕망
위의 그림은 달리(Salvador Dalí)의 「드러난 욕망」이다. 달리는 델보와는 다른 방식의 ‘꿈’을 통해 욕망을 보여준다. 달리에게 욕망은 명확히 성욕이며, 그래서 그의 그림은 대부분 성욕과 섹스를 직접적인 주제로 하고 있다. 그는 「욕망의 수수께끼」라는 그림에선 느끼한 질감의 벽에 얕은 구멍을 파고는, 그 구멍마다 수도 없이 그 답을 써 놓았다. “ma mére”, 우리 엄마, 그것이 욕망의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다. 이 점에서 달리는 미술계의 프로이트였다.
이 그림은 달리가 즐겨 사용했던 일종의 중의적 ‘응축’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보여준다. 오른쪽의 머리, 왼쪽의 꼬리를 보아 이 그림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자다. 그러나 왼쪽의 털은 유심히 보면 여인의 머리털이다. 그 옆엔 젖가슴도 있다. 이처럼 이는 사자와 여인이 섞인 그림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이런 형상을 종종 본다. A의 모자를 쓰고, B의 얼굴에 C의 머리 모양을 한 상(像), 이런 걸 프로이트는 ‘응축’이라고 불렀다. 여러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응축된 것이란 말이다. 이미지를 섞는 꿈의 작업 방식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치환’이다. 예를 들어 성교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나 다쳐서 피를 흘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치환이다. 이 그림에선 여인이라는 욕망의 대상이 사자의 형상으로 치환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달리는 응축과 치환에 의해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중의적으로 복합되는 형상을 탁월하게 만들어냈다. 프로이트를 이보다 더 철저하게 써먹은 사람을 찾긴 힘들 것 같다.
▲ 욕망과 정치
그러나 달리가 단지 프로이트주의자였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욕망은 일차적으로 성욕이며, 그것이 ‘승화’되어야 지식이나 예술, 사회적 활동에 대한 욕망으로 변환된다고 보았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책도, 이 책을 읽고 싶다고 느끼는 여러분의 욕망도 성욕의 승화라는 것이다. 납득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도리도 없다. 하지만 욕망이 어째서 모두 성욕이고, 그것의 승화인지가 증명된 것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들뢰즈/가타리 같은 사람들은 사회적 욕망은 직접적으로 사회적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성욕을 거치지 않고 사회적 장에 직접 투여된다는 것이다.
위의 그림은 달리의 「삶은 콩으로 만든 연한 구조물 : 내란의 예감」(Soft Construction with Boiled Beans Premonition of Civil War)이다. 이 그림에서는 내란이라는 사회적 사건이, 신체를 찢고 가르는 신체적 고통으로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강렬한 고통에서 승화된 성욕을 찾아내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 사회적 삶을 바꾸기 위해선 사회적 장에 투여되는 욕망의 양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런 이론적 변환을 통해 ‘욕망’(성욕이 아니라)이 오히려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할 수 있게 된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