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쉬르 ‘혁명’의 효과
소쉬르의 언어학은 종종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비유됩니다. 다만 소쉬르 자신이 그런 혁명’임을 주장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칸트와 달랐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언어학자의 이런 주장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철학적 혁명에 비유되었던 것일까요? 다시 말해 소쉬르가 언어학에 새로 제기한 명제들은 대체 어떤 의미와 효과를 갖는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요약합시다.
첫째, 체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개개의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랑그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체계입니다. 개인들이 말을 하기 위해선 그 규칙에 따라야 하고, 그 규칙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랑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 규칙에 따라 의미를 말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은 물론 ‘좋다’ ‘나쁘다’는 판단 역시 언어의 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을 가져다 쓸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런 점에서 의미나 판단 혹은 사고가 ‘주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언어구조에 내장되어 있고, 거꾸로 ‘주체’들이 사고하고 판단하기 위해선 이 언어구조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가능해집니다. 언어를 통해 의미나 사고, 판단을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체’는 더 이상 자기가 말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의 중심이 아닌 게 되며, 그 중심은 오히려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라는 객관적 구조에 있다는 게 분명해진 셈입니다. 이래서 소쉬르는, 그 자신은 구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소쉬르의 언어학은 주체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근대철학을, 그 중심을 해체함으로써 궤도에서 벗어나게 할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세계의 중심을 다시 주체 외부로 옮겨놓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할 요소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소쉬르 언어학의 탈근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아직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체만으론 언어구조를 하나의 단일하고 자기완결적인 체계로 간주하게 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주체는 그 단일한 언어구조가 빚어내는 ‘구조의 효과’로 정의되게 됩니다. 이때 구조란 언어를 사용하는 다수의 주체들이 동일하게 사용하는 기초를 제공하는 게 되며,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게 됩니다. 즉 칸트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선험적 구조’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주체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칸트와 다르지만(그래서 탈근대적이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판단의 단일하고 통일적인 구조란 점에서 칸트와 유사합니다(그래서 근대적입니다), 말하자면 주체 외부의 선험적 구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결국 선험적 구조를 주체 외부로 잠시 끄집어냈다가 다시 주체 내부에 옮겨놓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런 점에서 훔볼트의 칸트주의와 매우 유사하다는 데 주목합시다. 이런 한에서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근대적인 성격 또한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소쉬르 언어학의 내적인 모순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쉬르가 기호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표’와 ‘기의’라는 짝에 의해서입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 이미 말했지요? 12개의 숫자 사이를 규칙적으로 도는 저 물건을 굳이 ‘시계’라고 할 이유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시계’라고 쓰자고 일단 약속을 하면, ‘시계’라는 기호의 의미는 저런 종류의 물건으로 고정됩니다. 즉 기호(기표)와 의미(기의) 사이의 관계는 약속에 따라 고정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제 ‘시계’라는 기호를 보면 세 개의 바늘이 하루 종일 도는 저런 종류의 물건을 언제나 떠올리게 됩니다. 저 물건이 있는 한 ‘시계’란 기호는 계속 존재할 겁니다.
반면 기호의 ‘가치’란 개념을 앞서 보았지요? 그때 ‘개새끼’란 기호의 가치는 ‘강아지’란 기호와의 차이(다름)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지요? 이 차이가 바로 ‘개새끼’란 기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기호들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면 어떤 하나의 기호가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의미합니다(이는 소쉬르에게선 그다지 명시적으로 읽히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 사과 하나 둘로 쪼개 / 나눠 가질 줄 안다” (김남주, 「사랑은」)에 나오는 ‘사과’라는 기호와 “빌헬름 텔은 총독이 아들의 머리 위에 얹어 놓은 사과를 향해 떨리는 가슴으로 활시위를 놓았다”에 나오는 ‘사과’라는 기호를 비교해 봅시다. 앞 문장의 사과는 ‘사랑’, 열매 맺는 ‘가을’, ‘나눠갖다’와 같은 기호들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랑과 결실, 사랑과 나눠가짐, 그것이 주는 정감과 온기가 잘 익은 사과 빛깔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반면 뒤 문장의 사과는 ‘총독’, 이들의 머리 ‘위’, 거길 겨누고 있는 ‘활(화살)’ 등의 기호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총독의 억압과 모짊, 아들의 머리를 겨냥해야 하는 명사수 아버지의 고뇌와 그것이 주는 긴장이 팽팽하게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사과’는 말 그대로 기호들간의 관계에 의해 각자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 ‘사과’라는 동일한 기호에 새겨진 다른 기호의 흔적이 다른 것입니다. 위의 두 문장이 각각 나름의 소중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기호는 일단 약속이 성립된 연후에는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가질 거라는 앞의 명제와 모순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앞의 명제는, 언어구조 자체 내에서 기호의 의미를 언제나 고정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체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그 고정된 의미를 갖다 쓰는 것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 입장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즉 기호의 의미는 구조 안에서 고정된 것이고, 개인이 사용하는 의미나 받아들이는 의미는 이러한 구조의 효과라는 것입니다. 반면 뒤의 명제는 이런 구조주의적 명제를 흔들고 있으며, 체계화된 기호의 망 속에서도 기호의 의미(가치)가 얼마든지 가변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나중에 구조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예를 들면 데리다)에 의해 강조되고 부각됩니다(소쉬르에게 이러한 측면은 사실 매우 미약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순 역시 앞서처럼 근대적 측면과 탈근대적 측면이 소쉬르 언어학에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