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적 전환
Copernican Revolution
사물은 변하지 않는데 사물을 둘러싼 담론은 계속 변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이 이론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는 지동설이다. 16세기에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가 지동설(地動說)을 발표하기까지 태양계라는 ‘사물’에 관한 담론은 1500년 전에 확립된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os)의 천동설(天動說)이었다.
태양계가 생겨난 50억 년 전부터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매년 한 바퀴씩 돌았으나 천동설은 그 반대로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돈다고 설명했다. 천동설의 우주관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그 바깥에 행성들과 태양이 있는 천구가 있고, 또 그 바깥에 항성들이 있는 천구가 있으며, 또 그 바깥에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천동설이 그토록 오랫동안 사실로 여겨져 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눈으로 보기에는 천동설이 옳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다면 달이나 태양이나 별들이 지구 주위를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천동설의 초창기에도 이미 행성의 밝기가 달라진다든가 이따금씩 일부 행성이 역행 운동을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주전원(周轉圓)의 개념을 도입하여 수많은 부수적 중심, 즉 이심(異心)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내세워 그런 현상들도 천동설 체계에 꿰어 맞추었다. 그러나 과학적 관측이 정밀해짐에 따라, 천동설이 계속 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주전원과 이심이 필요해졌다. 일식과 월식 같은 천체 현상도 처음에는 천동설로 그럭저럭 설명할 수 있었으나 점차 오차가 커져 나중에는 예측 자체가 불가능해져버렸다.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눈에 보이는 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눈보다 과학이 더 정확하다고 믿었으며, 태양을 중심으로 발상을 전환할 경우 ‘눈에는 차지 않더라도’ 과학적으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다. 단순히 어떠한 지식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인식의 틀,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기 때문에 그 대전환은 단지 천문학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에 독일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에 비견될 만한 철학상의 대전환을 이루었다고 자신하고 그것을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그 전까지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인식 또는 지식이 인식 주체, 즉 정신의 바깥에서 온다고 믿었다. 인식이나 지식은 외부 사물에 대한 앎이므로 그런 태도는 당연했다. 사물의 실체를 이데아로 본 플라톤(Platon, BC 427~347)이나, 신이 창조하고 질서를 부여한 외부 실체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본 중세 실재론자들이나, 실체에 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본 영국 경험론자들이나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앎의 근원은 외부에 있고 모든 앎이 정신 활동의 바깥에서 온다는 것은 불변이었다. 실체는 언제나 그 자체로 존재하고 정신은 외부의 실체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었다.
칸트가 보기에 그것은 천동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의 지동설은 뭘까? 그는 전통적인 인식론을 정반대로 뒤집어 정신이 대상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사물이 붙박이로 존재하고 인식 주체가 그 주위를 돌면서 인식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인식 주체가 고정되어 있고 사물이 주체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다. 외견상으로 천동설이 진리처럼 보였듯이 언뜻 보기에는 주체가 사물을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게 상식인 듯하지만 실은 그 반대로 주체는 능동적으로 사물을 구성한다.
물론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정신 활동을 통해 사물에 변화를 줄 수는 없다. 칸트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속에는 사물의 인식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기본 형식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경험론자들은 감각을 곧 경험이라고 여겼지만 실은 감각은 자료에 불과할 뿐이고 그것을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정신 속에 내재된 형식이다. 마치 원료를 가공해 제품을 제조하는 공장처럼 우리의 정신은 감각자료를 해석해 경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대전환으로 칸트는 그 전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을 괴롭혀왔던 인식론의 커다란 난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합리론은 정신의 인식 작용에 너무 매달렸고 경험론은 대상의 실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그러나 칸트는 정신 안에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내재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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