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철학
『차이와 반복』에서 생성, 접속, 변이로서 차이의 개념을 정의하려고 했다면, 이제 들뢰즈는 그러한 관점에서 ‘의미의 논리’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의미란 통상 기호학이나 언어학 혹은 언어철학에서 다루거나, 그게 아니면 현상학에서 다루지요. 소쉬르는 의미란 기표에 의해 만들어지는 ‘청각 영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는 의미를 어떤 기호나 기표에 대응되는 어떤 것으로 다루는 것이지요. 구조주의자들은 의미를 언어구조에 속하는 것, 그래서 개별적으로는 변경될 수 없는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다룹니다. 라캉이 말하는 ‘기표의 물질성’이란 이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물론 의미는 언제나 봉합된 채 고정될 뿐이어서, 봉합된 부분이 튿어지고 다른 고정점에 정박하면 의미의 망 전체가 변하게 된다고 하지만, 이 역시 봉합된 한에서는 잠정적이나마 기표들의 직조된 망 안에 고정된 어떤 것으로 의미를 다루는 것입니다. 반면 현상학은 이런 통상적인 의미에 대해 ‘판단중지’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괄호로 묶어’,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게 무언지를 보자고 하지요. 대상을 자아와 연결하는 ‘지향성’(Intention)이 바로 그런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함으로써, 의미를 주관의 내부로 끌어들입니다.
들뢰즈는 의미를 주관 속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접속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현상학과 다르고, 사물의 어떤 상태에 대응하는 것이나 기호에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접속에 따라 생성되고 쉽사리 변이하는 것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다릅니다. 사물과 구별되는 ‘사건’(event, événement)이란 개념은 이처럼 생성과 변이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에서 의미에 접근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크다’는 것은 사물의 상태를 표시합니다. 그는 키가 크다. 그는 손이 크다 등등. 그런데 ‘커지다’는 어떤 하나의 상태를 표시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큰 것에 대해선 커진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 작은 것 역시 커지는 것과 다릅니다. 커진다는 것은 작은 상태에서 큰 상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상태와 큰 상태의 중간에, 두 상태의 사이에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그것은 크다’는 be 동사를 써서 ‘It is big’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이 커진다’는 ‘It becomes big’이라고 해야 합니다. be 동사가 사물의 상태를 표시하는 것이라면,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은 become이란 동사를 사용합니다. 전자가 ‘~임’이라면 후자는 ‘~됨’을 표시하는 동사지요. 불어에서는 être 동사와 devenir 동사를, 독일어에서는 sein 동사와 werden 동사를 각각 사용합니다. Werden이냐 devenir, becoming을 ‘생성’이라고 번역하지요. 생성이란 무에서 유가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인 겁니다.
이처럼 사물의 상태가 어떤 고정된 지점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생성(‘되기’)은 두 지점 사이 어딘가에서 발생합니다. 전자가 점(點)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선(線)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생성과 변이의 차원에서 의미를 정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만남으로써 발생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다루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사물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만남ㆍ접속에 속한 것이고, 만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물들의 만남을 통해 어떤 의미가 발생할 때, 그것을 들뢰즈는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검은 반점이 있는 둥근 공을 흔히 축구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팔리지요. 그 공이 공중을 떠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공이 발과 만나서 네트를 넘고 있다면, 다시 말해 그 공이 발과 네트와 연결된다면 그 공을 축구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족구공이라고 해야 맞지요. 만약 그 공이 손과 그물 달린 링(바스켓)과 연결된다면 어떻습니까? 이 경우 그것은 ‘농구공’으로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즉 그 공의 의미는 ‘농구공’이라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똑같은 하나의 공이 어떤 이웃항들과 접속되는가에 따라 공의 의미는 아주 달라집니다. 즉 다른 이웃을 만나면 다른 공이 되는 겁니다. 공의 의미는 공에 대응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공에 부착되는 것도 아닙니다. 접속하는 이웃들에 따라, 이웃관계에 따라 달라지는(become different), 혹은 변이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이웃항과 접속하면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 때, 그것을 ‘사건화’ 된다고 하고, 이렇게 복수의 사물을 하나의 계열(series)로 연결하는 것을 ‘계열화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사물은 계열화되는 선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사건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 인간의 눈, 기계의 눈
첫 번째 사진은 네트의 바다에서 탄생한 생명체, 그 인형사의 눈, 아니 그가 잠입했던 의체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이다. 시각적인 센서는 이처럼 ‘정확하게’ 인간의 모습을 기계적으로 포착한다. 두 번째 사진은 반대로 인형사를 분석하기 위해 인간들이 모니터링하고 있는 모습니다. 즉 인간의 눈에 비친 기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인간’의 눈일까? 기계적 센서를 통해서 모니터라는 기계적 망막에 비친 모습 아닌가? 그런 기계 없이, 혹은 인형사의 전기적 신호를 음성적 신호로 바꾸는 기계 없이 그들은 인형사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아니, 컴퓨터 모니터의 기계적 망막 없이 내 눈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씨조차 볼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눈이나 우리의 귀는, 아니 우리의 감각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기계적인 것이 아닐까? 기계의 증폭된 감각 없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이 너무도 작고 협소하다는 걸 안다면, 인형사만큼이나 우리 또한 기계들에 기대어 ‘살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