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공부란 트라우마에 직면하다
지금까지 시화집을 볼 때의 방점은 ‘해석이 되느냐?’, ‘서로 무언가를 비교한다면, 어떤 부분을 비교하는지 캐취할 수 있느냐?’에 중점을 두고 봤다. 시 자체도 하나도 와 닿지 않는데, 거기에 이론적인 분석까지 덧붙여서 하려니,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한문’이 그 당시 나에게 어떤 느낌의 학문이었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한 예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깜도 되지 않으면서 버거워하고 하나하나 풀어가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냥 맞닥뜨리고 무작정 막고 품으려고만 했다는 사실 말이다.
버거워하던 것들을 직면하다
최근에 어찌나 심심하던지 유튜브에 떠 있는 ‘용호의 권2’의 플레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용호의 권2’를 생각하면 1994년에 버추어 파이터와 함께 가동되어 수많은 오락실 키즈들의 시선과 돈을 빼앗아 가던 게임이고, 95년쯤엔 형이 네오지오를 사서 집에서 플레이할 수 있게 된 게임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번도 제대로 CPU와 붙어보려 한 적은 없다. 료와 로버트 중 골라서 비연질풍각만 마구 써대면 이겼기 때문이다. 같은 기술만 무한 반복해야 하니 재밌을 리 없지만, 솔직히 그 당시엔 그것만으로도 재밌었다. 하지만 금방 질릴 수밖에 없던 것. cpu의 취약점을 활용한 반복이 아닌, 직접 기술을 써가며 맞부딪혀도 되지만 전혀 그럴 용기를 내진 못했다. 막상 집에서 무한대로 게임을 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거기엔 일정적으로 ‘난 게임을 잘 못해’라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런 식으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하긴 싫다는 아집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그 영상에선 어떤 얍삽이도 쓰지 않고 정말 자기의 기술로 차근차근 맞부딪히며 게임을 하더라. 그건 마치 정식 무술로, 그리고 자기 실력으로 대련하는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고 그만큼 황홀하며 멋진 장면이었다.
나에게 한문이나 ‘용호의 권’은 같은 메타포를 지녔다. 버거움, 그럼에도 하고는 싶기에 정면돌파하려 하기보다 어떻게든 꾀를 피우고, 어떻게든 잰 척하려 하는 것.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실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알아가며 진행해도 되는데, 전혀 그러질 못했다. 한문은 오래전부터 해왔다는 자의식이 발동하여 실력이 없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제 정말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 앞에서 있어 보이려, 여러 가지를 하는 양 보이려 하고, 게임 같은 경우는 대면하지 못하고 얍삽이로 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 이 어려운 게임을 얍삽이 없이 깨고 있다.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게임인데, 난 무서워만 하며 한 번도 제대로 붙어보려 하지 않았다.
한시라는 트라우마, 무작정 알아야 한다는 강박
한문 자체도 그런 약점을 지녔는데, 거기에 한시는 더욱 더 철벽같은 느낌이었다. 당연히 거기엔 국문시에 대한 부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시에 이르고 보면 어떻게든 해석은 되지만, 도대체 이게 왜 맛이 있다는 건지,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공감을 해야 하는지 하나도 와 닿지가 않는 것이다. 그뿐인가, 시가 나에게 전혀 와 닿질 않으니, 그런 시를 통해 비평을 해놓은 시화집들의 이야기는 더더욱 공감이 될 리가 없었다. 하긴, 시화집은 시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지만 저자가 왜 그 시를 보고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 꿰뚫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건 애써 ‘임용시험은 그렇게까지 심도 높은 이해를 요구하지 않아’라는 알량한 방어의식이 작용하고 있었고, 나 자신의 실력을 직면하기 싫은 열등감도 작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김형술 교수의 수업은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아니 처음부터 한 걸음씩 나가듯 시작해보라는 것에 안성맞춤인 수업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어떤 부분을 등한시해 왔는지, 어떤 부분이 약점이었는지 이처럼 명료하게 그러면서도 속 시원하게 알려주고 깨쳐주고 자극해주는 수업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년간 한문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니, 정말 시기적절한 순간에 매우 시기적절한 죽비가 아닐 수 없다.
▲ 이 자리에선 한문에 대한 애정들이 넘실댔다. 한문이 이렇게 좋았던가? 할 정도로.
제대로 한문공부한다는 것
소화시평 상권46번 글에서 홍만종은 전문을 모두 싣지 않고 각 1연씩만 예로 들었기 때문에, 만약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금방 지나칠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해석에만 방점을 찍는다면 5분 안에도 해석하고 넘어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번에 교수님과 함께 술자리를 하면서 아주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다년간 가르친 아이들이나, 전주에서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나 실력적인 차이는 그다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에 대해선 아주 명료하게 알려주셨다. 그건 다름 아닌 공부에 파고드는 자세이고, 직면하여 제대로 이해하려는 치열함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이번에 나오는 문장처럼 시의 전문이 실려 있지 않은 경우 우리는 그저 1연씩 소개된 저 구절만을 해석하고 비평만 해석하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말지만, 그 아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전문을 찾아 해석하고 거기에 따라 새로운 어휘가 나올 경우 그 어휘를 찾아들어가 다양한 자료들을 탐독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부를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단순히 해석했다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정보를 습득함과 동시에 이해까지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작은 모두 미약했고 실력이 없다는 부분에선 동일했지만,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니 결국 엄청난 실력 차이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순간 깨달은 게 있었다. 그건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한문을 좋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버거워했는지, 다년간 공부했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도망만 다녔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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