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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 (3) 퍽 이상한 두 사람의 만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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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 (3) 퍽 이상한 두 사람의 만남

건방진방랑자 2022. 7. 13.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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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퍽 이상한 두 사람의 만남

 

 

이상과 같이 이기발이 시조를 즐겨 듣고 사대부의 내면을 담은 그 메시지에 공감하는 적극적인 향유자이자 그 노랫말을 한문으로 정확하게 옮길 역량을 지닌 번역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송경운의 본격적 등장에 앞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기발은 송경운전의 서사 모두(冒頭)에서 송경운과 전주에서 재회하는 장면을 재현하며, 자신의 존재감 역시 강하게 스며들도록 공을 들였다.

 

 

내가 탄 말 바로 앞에 다가와 그제야 자세히 보았더니, 바로 장안의 옛 악사 송경운이었다. 무심자는 예전에 그와 인연이 있었기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지팡이를 짚은 건 늙어서일 테고, 짤막한 베옷을 걸친 건 가난해서일 테고, 그냥 걸어가는 건 말이 없어서일 텐데, 그렇게 마음껏 노래하는 건 어째서인가?”

경운은 이내 활짝 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인 이제 나이가 일흔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소인은 예전에 음악을 좋아 했지요. 그러니 소인은 늙은 악사입니다. 노래란 음악 중에 으뜸가는 것이지 요. 늙은 악사로서 봄날의 흥에 겨워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게 이상하신지요?

及至馬頭, 乃熟視之, 長安舊樂師宋慶雲也. 無心子嘗有分, 笑而語曰: “竹杖老也, 短褐貧也, 不騎無馬也, 至於放歌, 何也?” 慶雲乃揚眉而對曰: “小人時年七十有餘, 而小人嘗好樂, 則小人乃老樂師也. 而歌乃樂之宗, 以老樂師, 乘春乘興而歌, 夫子惟是之異乎?”(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앞서 이 절에서 검토하고 있는 단락이 송경운전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으로 작품의 본격적 도입부가 된다고 언급했었다. 그 중 자세히 보았더니 장안의 옛 악사 송경운이었다라는 첫 구절은 작품에서 입전인물의 이름과 신분을 최초로 언급한 대목으로, 작가가 예전에 서울에서 보았던 한 악사와 오랜만에 해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기발이 서울에 머문 것이 1625년부터 대략 10년간이고, 송경운이 전주에 온 것이 1627년이므로 두 사람이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었던 것은 햇수로 3년에 불과하다. 이런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는 2장에서 수군절도사 이담(李憺)이 매개가 되었으리라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인맥은 시간이 흐른 지금 희미해져 버렸다. 송경운은 일찍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바 이담은 더 이상 그의 주인이 아니었고, 이기발은 아우 이생발이 1629년 서울에서 병사한 이래 사돈 이담과 멀어졌을 터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인연에는 인맥을 넘어서는 특별함이 있었다. 이기발이 송경운을 알아보자마자 웃으며 말을 건넨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웃음은 다소 착잡하다. ‘가난하여 말도 못 타고 걸어가는 노인네가 무엇이 좋다고 노래를 불러제끼는가?’라는 속물연(俗物然)하는 질문 이면에는, ‘나는 당신이 가난하지도 늙지도 않았을 때의 모습을 기억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빈곤하고 노쇠한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고 하는 서글픔이 개입해 있다. 그의 마음은 백거이(白居易)비파행(琵琶行)이나 두보(杜甫)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에서처럼 뜻밖의 장소에서 해후한 늙은 음악가에게서 인생의 무상함과 비애를 발견한 시인(詩人)의 상황과 맥이 닿는다. 하물며 그 자신도 해진 베옷에 여윈 말로 혼자 가는 신세임에랴.

 

그러나 늙은 악사 송경운은 떠돌이로 영락한 비파 연주자나 지는 꽃 같은 옛 명창 이구년처럼 처량하지 않다. 그는 짐짓 위악을 가장한 이기발의 질문에도 그늘 한 점 없이 활짝 웃으며 자신의 삶을 긍정할 따름이다. 송경운의 대답에는 이기발이 걱정한 가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대신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 삶의 본질임을 밝혔다. 노인이 되었어도 악사라는 고유한 정체성에는 변화가 없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취지다.

 

더 나아가, 완숙의 경지에 이른 늙은 악사로서 송경운은 음악의 본령 하나를 무심히 건드린다. ‘노래는 음악의 으뜸’[歌乃樂之宗]이라는 그의 명제는, 송경운의 다른 음악론인 음악에서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樂以悅人爲主]이라는 말과 유사하게 평이하면서도 음악의 본질에 닿고 있어 깊은 울림을 준다. 음악을 성악(聲樂)과 기악(器樂)으로 나눌 때 노래는 성악에 해당한다. 사람의 목소리로 이루어지며 말을 필요로 하는 성악 이 음악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송경운의 말은 음악과 함께 한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이 말은, 기악인 비파 연주로 거장(巨匠)의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그것을 훌쩍 넘어 음악 전체를 투시하는 통찰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음악가로서 도달한 정신의 깊이와 높이를 가늠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봄이다. ‘봄날이 나를 노래하게 한다는 송경운의 말에는 노년의 음악가가 보여줄 법한 삶에 대한 무한한 예찬이 담겨 있어 인상적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송경운이 서울에 그대로 머물렀어도 이 같은 행복한 결말에 이르렀을까. 아마도 그러기 어려웠을 것이다. 화려한 잔치 자리를 떠도는 삶은 그에게 부와 인기를 가져다줄 수는 있었을지언정 홀로 봄날의 산길을 걸으며 노래할 여유는 허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이에 송경운의 전주 이주는 타인의 시선에서 빛나 보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스스로의 내면적 요구를 따른 적절한 선택으로 심중한 의미를 갖는다.

 

이어지는 송경운의 말은, 자신이 보았던 이기발의 서울 시절을 떠올린 것이다.

 

 

소인이 알기로 선생님은 옛날에 임금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분인데, 수놓은 비단옷을 해진 베옷으로 바꿔 입고 멋진 청총마(靑驄馬) 대신 여윈 말을 타고 설랑 그 많던 뒤따르던 종들은 어찌하시고 노복 하나도 없이 서울의 큰길 대 신 산길을 가고 계시는지요? 어째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고 계십니까? 소인 은 선생님이 유독 이상해 보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로 즐겁게 노닐며 한나절을 보냈던 것이다.

小人知夫子舊日近侍, 換綉衣以弊布, 替驄以羸, 易多騶以無蒼頭, 代紫陌以山蹊, 何自苦如此? 小人惟夫子是異!” 遂相與遊戲半日.(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송경운은 전주 사람들이 보지 못한 이기발의 과거를 목격했었다. 이기발이 역임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은 둘 다 대간(臺諫)에 속하는 벼슬로 백관을 규찰하고 시정(時政)을 논하여 국왕에게 간언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삼는다近侍之臣이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로 승지나 사관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기발은 1633년 정언에, 1635년 지평에 제수되어 1636년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승정원일기 16331125, 이기발을 정언으로 삼다; 16341112, 이기발을 정언으로 삼다; 1635116, 이기발을 지평으로 삼다) 지평을 포함한 대관(臺官)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책무가 막중했으며,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는데, 이기발 역시 그런 예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기발 은 36세 되던 1637819일에 북청 판관에 부임하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더 이상 조정에 나타나기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실록에서는 이런 이기발에 대해 정축년(1637) 이후로는 마침내 나와 벼슬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이런 점에서 1636년의 병자호란이 이기발의 생애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임금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분이라는 언급이 정확히 그 점을 가리킨다. 당시 이기발의 외양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쳤던가. 그는 수놓은 비단 관복을 입고 청총마를 타고 여러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울의 대로를 누비는 잘 나가는 중앙관료였다. 이기발이 송경운의 늙고 가난한 모습 뒤로 화려한 시절을 보는 것처럼, 송경운도 이기발의 쓸쓸한 현재 너머, 세상을 바꾸겠다는 패기에 넘치던 신진 관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송경운은 이기발의 현재를 고생을 사서 하는 것’[自苦]이라 표현했고, 만약 지금의 삶을 선택한 자신이 이상하다면 이기발 역시 이상한 사람이라고 농담을 건넨다. 이 말은 과거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둘의 현재가 닮았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이 현재에 이르게 된 동기나 경로, 두 사람이 지닌 삶의 지 향 역시 비슷하다는 함의를 갖는다. 즉 두 사람은 저마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적 요구를 따르는 삶을 택했다. 이런 선택을 긍정한 송경운의 이야기와 그 선택의 결과로서 그의 모습은, 자신의 현재에 가끔 낙담하고 본래의 품은 뜻에 회의를 갖기도 했을 낙향한 전직 중앙관료에게 이해와 공감과 위로를 선사하며 그 역시 삶의 길을 제대로 선택한 것이라고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속인(俗人)이 보기에는 퍽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이상한사람은 서로 닮은 것을 알게 되어 퍽 유쾌했다. 그래서 봄꽃이 한창인 전주성 서문 근처에서 즐겁게 노닐며 한나절을 보냈다.

 

 

「도판5」 「전주지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일부. 왼쪽에 표시된 서문 근처에서 송경운과 이기발이 만났을 터이다. 봄꽃이 만발한 전주 도성을 그린 이 지도는 두 사람의 만남과 퍽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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