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의.
이것은 여래가 자신을 여래라 부르는 것에 대한 최종적 선포이다. ‘bhūta-tathatā’를 라집(羅什)은 ‘여(如)’라는 단 한마디로 번역하였다.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여如)이라면 사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따로 설정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라면 ‘구원(Salvation)’이라는 개념이 성립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如)’는 문자 그대로 ‘같다’이다. ‘여여(如如)’는 ‘같고 같다’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불교에서 이 여자(如字)만큼 혼란스러운 글자가 없다. 사실 인도사람들이나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여(如)’라는 말을 쓰면서도, 이것을 변화의 배후에 상정되는 불변의 진리라는 식으로 쓸 때가 많다. 다시 말해서 생멸(生滅)하는 현상의 근원을 이루는 불변(不變)의, 항상 같고 같은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의 배후에 항상 같고 같은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실체의 오류’일 수밖에 없다. 일본학자들은 이러한 오류에 대해 일반적으로 섬세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어에서의 ‘여(如)’는 그냥 ‘그러한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현상과 본체라는 이원적 인식의 구조가 근원적으로 틀 지워져 있지 않은 상태의, 말하자면 아무 틀이 없는 가운데서의 그냥 그러한 모습이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현상일원론적 해석이다. 나는 『금강경』은 이러한 철저한 현상일원론적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물론 여기 ‘현상’이라는 말 자체의 상대적 어폐가 또 개재된다). 바로 이 점이 『금강경』이 후대에 선의 소의(所依)경전으로 인식된 측면일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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