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있다고 한다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이런 귀한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須菩堤!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者, 然燈佛則不與我受記, 汝於來世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无有法得阿耨多羅三藐 三菩堤, 是故然燈佛與我受記作是言, 汝於來世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수보리! 약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연등불즉불여아수기, 여어래세당득작불, 호석가모니. 이실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시고연등불여아수기작시언, 여어래세당득작불, 호석가모니.
명본(明本)에는 고려본의 ‘수기(受記)’가 ‘수기(授記)’로 되어 있다. 일반불교용어로 말할 때는 ‘수기(授記)’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쓰인다. 그런데 ‘수기(授記)’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기(記, 증거, 확약, 표시)를 준다(수授)’는 뜻이다. 즉 ‘수기(授記)’라 할 때는 수(授)가 ‘준다’는 타동사이고 기가 그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수기(受記)’라는 표현은 그 전체가 여(與)라는 수여동사의 직접목적이 되어 있다. ‘여수기(與受記)’는 ‘기를 받음을 허락한다.’ ‘받을 기를 주다’가 된다. 따라서 우리 해인사본에서는 수(授)자를 안쓰고 수(受)자를 의도적으로 쓴 것이다. 우리나라 통용본들은 이러한 맥락의 고려가 없이 이 수를 수로 고친 것들이 대부분이다. 참 딱한 노릇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라 할 때 ‘석가(釋迦)’는 싯달타가 속한 종족의 이름이다. 종족은 부족보다 작은 단위의 원시적 씨족 공동체를 말한다. 우리나라 ‘성씨마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모니(牟尼)’는 ‘영감을 얻은 자’, ‘예언자’, ‘고행자’, ‘성자’의 뜻이다. 석가모니란 ‘석가족의 존경받는 수행자’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것의 해석에 있어, 모든 번역자들이 적당히 넘어가는데, 내가 생각키에 정확하게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콘체의 번역대로 ‘어떤 한 법이 존재하여, 그 존재하는 법에 의하여 여래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는다’는 뜻이 있을 것이다(There is not any dharma by which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콘체의 번역문 맥락은 그러한 법의 존재를 부정하는 맥락이지만, 일단 그러한 법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콘체의 텍스트와 라집역의 텍스트는 대조할 수 있도록 일치하지 않는다. 라집역은 한문의 맥락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정도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여래가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하는 마음의 상태가 하나의 법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하는 마음의 상태가 하나의 실체화되는 오류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법을 부정하게 되면, 무상정등각 그 자체의 존재성이 해소되어 버릴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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