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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이십육분 - 26.1~2 ~ 以三十二相觀如來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이십육분 - 26.1~2 ~ 以三十二相觀如來

건방진방랑자 2022. 11. 2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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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법신은 모습이 없다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26-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느뇨?”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觀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관여래불?”

 

26-2.

수보리가 사뢰어 말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須菩堤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觀如來.”

수보리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관여래.”

 

 

여기 수보리의 대답이 우리의 상식적 기대를 벗어나 있다. 분명히 여태까지의 일관된 논리구조 속에서 이를 논하면 분명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아서는 아니 되고, 또 그렇게는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바로 이것이 방편(方便) 설법이라는 것이다. 수보리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같이 듣는 뭇중생들을 위하여 자신을 낮춘 것이다. 즉 방편적으로 틀린 대답을 함으로써 부처님의 강도 높은 진리의 설법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수보리의 대답은 틀린 대답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재미난 문제가 개재(介在)되고 있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전혀 이런 다이내미즘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를 삼십이상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수보리는, “스승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스승님의 말씀을 이해한 바로는 여래는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때 스승님은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렇다! 정말 그렇다! 수보리야! 네 말대로다. 수보리야! 네 말 그대로다. 여래는 어떤 모습을 구비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

 

그렇다면, 여기 라집역(羅什譯)여시여시(如是如是)’는 수보리의 말이 아니라, 붓다의 말이 되어야 할 것이고, 무엇인가가 앞뒤전후로 하여 누락되었거나 잘못 개찬(改撰)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즉 텍스트의 오사(誤寫, text corruption)가 발생한 것이다. 정말 그런가??

 

앞뒤 문맥을 면밀히 검토할 때 우리는 텍스트의 오사가 일어났다고 볼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앞뒤 논리의 전개가 원문과 비교해보아도 그 나름대로의 정연한 논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라집(羅什)이라고 하는 위대한 연출가를 발견한다. 계속 반복되는 텍스트의 내용을 똑같이 번역ㆍ연출하는데 라집은 싫증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반어적(反語的)인 뉴전(扭轉, 비틀어줌)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루하지 않게 텍스트를 계속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번역은 제2의 창조라는 금언을 되새기기 전에 라집의 정신적 경지가 금강경의 기자(記者)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숭고한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이러한 뉴전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인용

목차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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