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만약 네 말대로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해야 될 것인가?”
佛言: “須菩堤! 若以三十二相觀如來者, 轉輪聖王則是如來.”
불언: “수보리! 약이삼십이상관여래자, 전륜성왕즉시여래.”
나의 번역은 라집(羅什) 말 그대로의 직역은 아니지만, 그 내면의 흐름을 표출시킨 의역이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이란 ‘cakravarti-rāja’를 일컫는 것인데 그 뜻은 ‘바퀴를 굴리는 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바퀴라는 것은 인도 고대의 성왕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를 상징화하는 것으로, 적진에 자유자재로 굴러다니면서 적을 분쇄하는 무기인 것이다. 흔히 불교에서 법륜(法輪)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을 이렇게 우리의 무명을 쳐부수는 바퀴로 상징한 데서 생겨난 말인 것이다. 전륜성왕은 세속적인 통치자이지만 이와 같은 정의(正義)의 법륜(法輪)을 가지고서 이 세계를 통치하는 이상적인 지배자인 것이다. 플라톤이 꿈꾼 ‘철인왕(哲人王, Philosopher King)’이나, 장자(莊子)가 말하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이나, 인도인이 말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은 동일한 세속적 메시아니즘의 표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금강경』이라는 문헌이 전륜성왕으로 불리운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까왕의 치세 후에 성립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금강경』 기자의 레퍼런스는 암암리 아쇼까왕 같은 이에게 가 있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32상(三十二相)’ 관념은 오직 붓다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이 전륜성왕 또한 32상을 구비하여 태어나며, 즉위할 때, 하늘로부터 이 윤보(輪寶)를 감득(感得)하여 그것을 굴려 전 인도를 정복하게 된다는 메시아적 전설이 공존(共存)하고 있었던 것이다.
붓다의 대답은 바로 이러한 32상을 구비했다고 하는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라 한들 과연 그를 여래로 볼 수 있겠냐고 비꼰 것이다.
수보리의 말대로 여래를 상으로 볼 수 있다면 그러한 상을 구비한 자로 여겨지는 전륜성왕이야말로 곧 여래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 붓다의 어조 속에는 종교가 결단코 정치에 아부할 수 없다는 날카로운 새카즘(Sarcasms, 비아냥)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를 많은 자들이 ‘호국불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과거 신라에 있어서 이국(異國)의 발호로부터 불법(佛法)의 힘을 빌어 나라를 지킨다고 하는 호국(護國)의 관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역사적 상황에서 그렇게 형성된 것일 뿐 그러한 역사적 상황이 곧 종교의 본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는 나라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요즘처럼 선거때만 되면 종교가 들러리를 서지 못해 안달하는 이러한 추세는 호국불교, 아니 그 명분을 본따 덩달아 춤을 추는 호국기독교의 반동적 성격을 모방하는 추태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는 호국불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기독교는 호국기독교가 되면 필망한다. 오로지 불법과 하나님의 진리를 이 땅에 실현할 뿐인 것이다. 아무리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라 한들, 그를 여래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정치이념이라는 것은 아라야식(阿賴耶識, alaya-vijñāna)을 스쳐 지나가는 한 티끌도 아니 되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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