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위엄 있는 그 모습 고요하기도 하다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29-1.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를 일컬어, 오는 듯 가는 듯, 앉는 듯 눕는 듯하다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須菩堤! 若有人言如來若來若去, 若坐若臥, 是人不解我所說義.
“수보리! 약유인언여래약래약거, 약좌약와, 시인불해아소설의.
29-2.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无所去, 故名如來.”
하이고? 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나는 인간적으로 이 분을 매우 좋아한다. 그 언어가 극히 평이하고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자체의 뜻을 아주 시적(詩的)으로 리드믹하게 표현해주었기 때문이다. 나카무라는 여래(如來, tathāgata)의 본뜻이 여기서 해설하듯 그런 말 자체의 풀이에서 유래되는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그렇게 간 사람’의 뜻으로 ‘완전한 인격자’, ‘인격의 완성자’라는 단순한 존칭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금강경』의 시대에만 와도 이미 벌써 ‘따타가따’에 대한 어원풀이를 가지고 많은 의미의 펀(pun)을 지어내는 논의가 성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더우기 ‘여래(如來)’라는 번역술어가 확립된 이후의 중국에서는 그 뜻을 원전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래’라고 하는 한역개념 그 자체에서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적인 레토릭이 무한히 개발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상력의 원천을 바로 『금강경』의 이 분이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따타가따’에서 ‘갔다’는 의미보다는, 이승의 구원을 위하여 ‘왔다’라고 하는 이타(利他)의 구제자적 성격이 강조되었다는 것은 이미 2분 2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제1절 ‘약내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의 번역은 산스크리트 원문이 ‘여래는 가고, 혹은 오고, 혹은 머물고, 혹은 앉고, 혹은 침대에 눕는다’로 되어 있으므로, ‘오거나 가거나 앉거나 눕거나 한다’로 번역할 수 있지만, 그렇게 번역하면 한역의 맛이 사라진다. 여기 ‘약내약거(若來若去)’식의 표현은 이미 『노자(老子)』에 나오는 표현방식을 빌린 것이다. 『노자』 6장에 ‘면면약존(綿綿若存, 면면히 이어져, 있는 듯)이라는 말이 있고, 41장에 ‘약존약망(若存若亡, 있는 듯 없는 듯)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표현에 따라 중국인들은 이를 대구적(對句的)으로 이해한 것이다. ‘온다, 간다’보다 ‘오는 듯 가는 듯’, 그 얼마나 시적인가?
제2절의 ‘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그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 구절인가? 우리의 인생이여!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아름다운 삶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어찌 창조와 종말을 운운하랴!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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