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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삼십분 - 30.1 ~ 是微塵衆寧爲多不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삼십분 - 30.1 ~ 是微塵衆寧爲多不

건방진방랑자 2022. 11. 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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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모으나 흩어지나 한 모습

일합리상분(一合理相分)

 

 

30-1.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힘껏 부숴 티끌로 만든다면, 네 뜻에 어떠하뇨, 그 티끌들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須菩堤!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千世界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寧爲多不?”

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이삼천대천세계쇄위미진. 어의운하? 시미진중녕위다불?”

 

 

우선 분명(分名)에 텍스트의 문제가 있다. 세조언해본에 보면 분명이 일합상리분(一合相理分)’으로 되어 있고(김운학본, 석진오본) 또 기타 통용본에는 일합리상분(一合理相分)’(무비, 이기영)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전사(轉寫)과정에서 생겨난 동음이자(同音異字)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 원명은 나카무라가 제시하는 바대로 일합리상분(一合離相分)’이다. 기타 판본은 ()’()’로 잘못 표기한 데서 생겨난 전사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조에 통용된 금강경본들이 매우 판본학적으로 열악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불교의 텍스트는 일단 모두 해인사대장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물론 분명(分名)과 해인사판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조언해본에 관하여 대체적인 소감을 이야기 한다면, 판본이나 언해나 모두 탄탄한 기초 위에서 진행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관여된 학자들의 불경이해 수준이 정밀함을 결하고 있고 그 의취의 깊은 곳을 세밀하게 파헤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옛말을 연구하는데는 큰 도움을 준다. 불경연구의 방편으로서 별로 큰 가치는 없지만 당대의 상황에서 훈민정음을 민중의 보편적 언어수단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학문이라 해서 옛 사람들이 더 잘 알았으리라는 망상은 버려야 한다. 자료의 범위가 협애하고 인식의 범주가 너무 제한되어 있는 상황이 많다. 오히려 21세기야말로 고전학의 최전성 시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콘체는 금강경의 주 텍스트가 132에서 끝난다고 보고 그 이하 29까지는 주 텍스트의 조잡한 재탕비빔밥으로 보았지만, 30분부터는 새로운 텍스트가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30분부터 다시 주석을 개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는 금강경을 바라보지 않지만, 30분은 여태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불교의 핵심이론의 새 측면을 텃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이 합리(合離) 즉 리합(離合)의 문제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이합집산(離合集散)이라는 말이 있다. 떨어졌다. 붙었다, 모아졌다, 흩어졌다는 뜻이다. 전통적인 중국인의 세계관에 있어서는 기()취산(聚散)’과 같은 용례가 이미 장자(莊子)에 나오고 있는데(잡편 즉양(則陽)편에 나온다), 이러한 취(=)ㆍ산(=)의 개념을 불교(佛敎)적 세계관의 격의의 틀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합()이란 매크로(거시)의 세계다. ()란 마이크로(미시)의 세계이다. 우리가 보통 인식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합()의 세계이다. 매크로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바라보는 것들, 나무, , 사람, 책상, 항아리 이 모든 것들이 매우 거시적인 사태들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거시적 세계의 인식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거시적인 세계는 항상 마야 즉 환()의 가능성으로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사물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매크로에서 마이크로로 들어가면 반드시 인식론이 개재된다. 인식론적 반성이 없이는 마이크로의 세계를 논구할 수가 없다. 아마도 불교와 기독교가 그 세계관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인식론의 유무다. 기독교는 종교적 진리에 관한 한, 인식론을 거부한다. 예수가 죽었다 살아났다!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그것을 과연 우리는 정당한 판단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러한 모든 분석, 특히 인식론적 분석을 기독교는 거부한다. 기독교가 인식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인식론이 기독교 서구라파 문명전통에서는 과학이나 철학의 분야로 독립되었다.

 

그래서 철학은 인식론적 반성을 가지고 과학적 세계관을 지원했기 때문에 근세에 오면 종교와 치열한 대립양상을 벌인다. 부루노ㆍ갈릴레오데카르트ㆍ뉴턴, 칸트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가 기독교와 긴장감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불교는 모든 인식론적 가능성을 수용한다. 불교는 어떠한 명제에 어떠한 분석을 가해도 그 결과가 조금도 그 종교적 진리와 어긋남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인식론적 반성의 철저성 위에 서있기 때문에 철학이나 과학과 전혀 대립할 필요가 없다. 아니, 불교에서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심오성인 동시에 그 한계인 것이다. 기독교전통에서는 인식론이 종교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이 발달되었고, 불교전통에서는 그것이 합일(合一)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의 발전이 저해된 그러한 아이러니를 인류의 역사는 노정(露呈)시킨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역사에 있어서, 과학의 성과가 인류의 보편적 자산이 되어가는 지금, 과연 그 양상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인류사를 바라봐야 하는 시점에 온 것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죽으라고 힘들게 쓰고 있는 나의 책상 앞에는 큰 창이 있고 그 앞에는 푸른 잔디밭이 있다. 과연 내 앞에 잔디밭(lawn)이 있는가?

 

저기 잔디밭이 있다! 저기 잔디밭이라는 존재가 있다! 저기 잔디밭이라는 존재의 실체가 있다! 과연 그런가? 잔디밭은 거시적 세계다! 그러나 미시적 세계로 들어가보면 그것은 많은 풀들로 이루어져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과연 잔디밭은 있는가?

 

아이쿠 이놈의 지겨운 잔디밭이여! 남의 집 잔디밭을 보면 아주 아름다웁게 보인다.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은 좋다. 그러나 그것을 가꾸는 주인집 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칠 노릇이다. 매주 잔디를 깎아주어야 하고 심심하면 나가서 잡초를 뽑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짓을 안 하면 잔디밭은 곧 흉물이 되어 버린다. 두 주만 안 가꾸고 내버려두어도 그것은 잔디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잔디 아닌 잡초의 수풀이 되어버리고 낭만적인 초원이 아닌 지렁이ㆍ모기ㆍ뱀이 우글거리는 덤불로 바뀐다. 생각해 보라! 잔디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잔디는 과연 존재()인가? 나는 매일 아침 이 글을 쓰다 말고 잔디밭에 나가 잡초를 뽑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몇 평 남짓한 터에라도 푸른 풀밭이 있다는 것이, 매일 갇혀 살다시피하는 나에게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러나 잡초를 뽑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이 잡초에게 얼마나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들에 나가면 바랭이 웬수, 집에 들어오면 시누이 웬수라던데! 과연 뗏장풀과 클로바와 바랭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과연 무엇을 뽑아내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불교에 있어서 매우 본질적인 질문이다.

 

지금 나라는 존재를 한번 잔디밭이라고 생각해보라! 과연 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어떤 존재의 형태는 마치 수없는 잔디풀이 모여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러한 잔디밭과도 같이, 수없는 세포가 모여 어떤 역동적 동일성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 무엇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의 유지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잔디밭의 유지가 하나의 폭력이라면, 그대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가? 나의 존재는 하나의 폭력이다! 나의 생명은 신()의 폭력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런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가? 몸을 하루만 안 가꾸어도 내 몸은 잡초처럼 온갖 꼬무래기들이 돋아나고 병이 걸리고 하지를 않는가? 암이 걸리지 않기 위해 나는 얼마나 이 하루를 정결하게 살아야 하는가? 나의 몸의 호미오스타시스(평형) 체계는 분명 잔디밭의 유지와 같은 폭력적 사태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 분의 12절은 리() 즉 미시의 세계를 말한다. 34절은 합() 즉 거시의 세계를 말한다. 여기서 말한 티끌이란 곧 리()의 미시적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실체의 문제로 돌아가서, 우리가 잔디라는 합의 상태가 존재하지도 않는 가합(假合)의 픽션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과학적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거시적인 가합상태는 실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가합상태를 구성하는 구성 최소단위 그 자체는 실존(實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과학적인 원자론의 세계관은 대강 이러한 생각 위에 서있다. 이 구성 최소단위를 소승불교에서는 바로 법() 즉 다르마라고 불렀다. 이러한 소승부파불교의 입장을 우리는 아공법유(我空法有)’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실체는 없지만 나를 구성하는 법은 실유(實有)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법의 실유론(實有論, realism)을 대변하는 철학이 바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asti-vadin)라는 소승철학불교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금강경은 이러한 유론(有論)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매우 래디칼한 사상인 것이다. ‘아공법유(我空法有)’라고 한다면 결국 무아론(無我論)’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잔디밭은 풀 한 포기 한 포기로 구성되어 있다. 잔디밭은 없어도 풀은 있다. 과연 그런가? 풀 한 포기는 또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또 다시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의 식물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또 그 세포 하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핵과 세포질과 세포막과 미토콘드리아, 골지체, 리보좀 그럼 또 핵은? DNA?

 

무아론(無我論)의 궁극은 법유(法有)를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이 세계는 공()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대들 각자가 찾아보라!

 

30분의 해석에 있어서 산스크리트 원문은 매우 애매한 곳이 많다. 나는 최소한 한문의 미진중(微塵衆)’은 단순히 미진(微塵)’의 복수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그 이상의 의미를 이 말에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원문의 뜻은 원자(原子)의 집합체(集合體)’로 되어있고(나카무라 번역), 콘체는 ‘a collection of atomic quantities’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가루로 부숴만든 결과가 또 다시 집합체(集合體)’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석연치 않다. ‘집합체(集合體)’라든가 ‘collection’이라는 표현은 이미 가합(假合)의 매크로한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원자(原子)’집합체(集合體)’는 동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도인들은 원자 그 자체가 시공을 점유하는 미세단위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덩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단위는 먼지라는 덩어리먼짓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그 먼짓덩어리가 많으냐 적으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나 한어(漢語)미진중(微塵衆)’이라는 번역은 그러한 복합적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이 분()은 산스크리트 원문을 무시하고 그냥 라집(羅什)의 한역(漢譯)의 뜻에 충실하게 읽는 것이 좋다.

 

이 삼천대천세계를 마이크로한 세계로 부숴버리면 티끌(미진微塵)이라는 법()이 남지 않겠는가? 바로 이 법()조차를, 30분의 철학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내 번역문 힘껏 부숴 티끌로 만든다면’, 중의 힘껏은 산스크리트 원문에 있는 표현을 삽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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