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앎을 갖지 말지어다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31-1.
“수보리야! 누가 부처가 아견ㆍ인견 ㆍ중생견ㆍ수자견을 설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이 사람이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느냐?”
“須菩堤! 若人言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堤! 於意云何? 是人解我所說義不?”
“수보리! 약인언불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수보리! 어의운하? 시인해아소설의불?”
31-2.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ㆍ인견ㆍ중생견ㆍ수자견은 곧 아견 인견 ㆍ중생견ㆍ수자견이 아니오이다. 그래서 비로소 아견ㆍ인견ㆍ중생견ㆍ수자견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니이다.”
“世尊! 是人不解如來所說義. 何以故? 世尊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세존! 시인불해여래소설의. 하이고? 세존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즉비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시명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31-3.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은 일체의 법에서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깨달을지니, 마음에 법의 상을 짓지 말라. 수보리야! 말한 바의 법의 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는 곧 말하였다. 법의 상이 아니라고, 그래서 우리는 법의 상이라 이름하는 것뿐이니라.”
“須菩堤!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 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須菩堤!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어일체법, 응여시지, 如是 견, 여시신해, 불생법상. 수보리! 소언법상자, 여래설즉비법상. 시명법상.”
분명(分名)으로 ‘지견(知見)’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흔히 우리 불교계에서, 특히 사려 깊지 못한 스님들이 이를 ‘알음알이’라고 번역하는데, 제발 이런 추잡스러운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언어란 그 나름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법칙이 있고, 또 의미론적으로나 성운학적으로 또 통사론적으로 가장 합당하고 가장 아름다운 말을 선택해서 써야하는 것이다. ‘알음알이’, ‘먹거리’ 이 따위 말들은 전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고, 최근세에 무식한 자들에 의해 날조된 매우 천박한 비국어(非國語)이다. ‘먹을 거리’는 가능한 말이래도 ‘먹거리’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어떻게 동사의 어간이 관형사형 어미가 없이 직접 명사에 붙을 수 있는가? ‘하다’에서 ‘하일’이 가능한가? ‘할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먹거리’가 우리말이라면, 옷은 ‘입거리’가 되어야 하고, ‘볼거리’는 ‘보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의 합성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우리말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왜 하필 ‘먹다’라는 천박한 느낌의 말을 어간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자실 거리’라 해도 될 것이요, 얼마든지 다른 좋은 표현이 있을 것이다. 한어(漢語)를 피한다 해서 천박하고 어법에 벗어나는 우리말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타락이요, 우리 언어생활 격조의 하락일 뿐이다.
‘알음알이’도 통사적으로나 음성학적으로나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에 불과하다. ‘알다’에서 ‘알이’라는 비루먹은 명사형은 도출될 수가 없다. 그냥 ‘앎’이라 해도 좋고 그냥 ‘알음알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의 무의식적 유포가 승려사회에서 마치 지식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천시하고 격하시키는 그릇된 관념을 형성시킨다면 그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그것은 단지 스님들의 무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그릇된 방편에 불과하다. 절깐 문턱에 ‘알음알이를 가진 자 여기를 넘어오지 말라’는 둥, 이따위 불결한 팻말을 돌에 새겨놓고 있는 스님네들! 그대들 알음알이부터 후벼 파내버리시오! 지견(知見)을 가진 자일수록 절깐에 들어와야 하고, 우리는 그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어 친절하게 그들의 지견(知見)을 버리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불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대화를 거부해서는 아니 된다. 방망이를 함부로 휘두르지 말라! 방망이는 곧 너를 향해 들어라! 이것이 곧 대승정신일지니.
2절 제일 앞머리의 ‘세존(世尊)’ 앞에 세조본,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 통용본에는 ‘불야(不也)’가 삽입되어 있다. 내가 통용본이 조잡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곳에 다른 곳과 비교하여 같은 패턴으로 획일화시키는 것이 더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매끄럼하게 불필요한 말들을 삽입하는 용렬함 때문이다. 라집(羅什)은 그러한 획일적 병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해인사판본에는 그러한 용렬한 자의 장난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 신선한 고본(古本)의 고졸(古拙)한 느낌! 그 이상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대정(大正)』본은 우리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
3절에 대해선 불필언설(不必言說).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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