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지은 법이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
그대들이여
이 같이 볼지니.”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하이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4.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심을 마치시었다. 장로 수보리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색과 우바이, 그리고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믿고 받아 들이고, 받들어 행하더라.
佛說是經已. 長老須菩堤及諸比丘比丘尼優婆色優婆夷, 一切世間天人阿修羅,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金剛般若波羅密經.
불설시경이. 장로수보리급제비구비구니우바색우바이, 일체세간천인아수라, 문불소설, 개대환희, 신수봉행금강반야바라밀경.
모든 초기불교경전이 끝나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끝나고 있다. ‘비구비구니우바색우바이(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는 1분 1절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초기 불교승가를 구성한 사부대중(四部大衆: 사중四衆, 사부중四部衆)을 말하고 있다. 비구(比丘, bhikṣu)와 비구니(比丘尼, bhikṣuṇī)는 출가이중(出家二衆)으로 구족계(具足戒)를 받는 사람들이 우바색(優婆塞, upāsaka, ‘우바새’로 읽기도 한다)과 우바이(優婆夷, upāsikā)는 재가이중(在家二衆)으로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오계(五戒)를 받는다【불살생(不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婬)ㆍ불망어(不妄語)ㆍ불음주(不飮酒)】. 우바색(優婆塞)은 남성으로, 청신사(淸信士), 근사남(近事男), 선숙남(善宿男) 등으로 의역되고, 우바이(優婆夷)는 여성으로, 청신녀(淸信女), 근사녀(近事女), 선숙녀(善宿女) 등으로 의역된다.
우바색(優婆塞) | 우바이(優婆夷) |
청신사(淸信士) | 청신녀(淸信女) |
근사남(近事男) | 근사녀(近事女) |
선숙남(善宿男) | 선숙녀(善宿女) |
통용본에는 제일 마지막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라는 목적어가 빠져있다. 그러나 라집본(羅什本)의 유일한 정통 텍스트인 우리 해인사고려대장경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 들어 있으므로 반드시 이 경(經)의 이름으로 이 경을 끝내야 한다. 『대정(大正)』도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본도 마지막에 이 경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통용본들이 『금강경』을 ‘신수봉행(信受奉行)’에서 끝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의 진언(眞言)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더 중요한 판본의 문제는 바로 라집본(羅什本)에 유일하게 그 뒤로 진언(眞言)이 붙어있다는 사실이다. 『금강경』의 모든 한역본 중에서 진언이 있는 것은 라집역본(羅什譯本) 하나밖에 없다. 보뎨류지(菩提流支, 류지留支), 진체(眞諦), 달마급다(達摩笈多), 현장(玄奘), 의정(義淨)의 역본이 모두 이 진언을 결(缺)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존(存)하는 산스크리트본에도 진언이 빠져 있는데 그렇다고 라집이 이 진언을 창작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라집이 저본으로 쓴 산스크리트 텍스트에는 이 진언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티벹본에는 보다 자세한 진언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라집역본(羅什譯本) 외의 모든 다른 판본,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 세조본 이하 우리나라의 모든 통용본이 의도적으로 이 진언을 빼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진언을 빼버린 것은 『금강경』의 이해가 선종화禪宗化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진언을 빼버릴 수는 없다. 우리 해인사대장경판의 소중함은 바로 이 『금강경』의 경우만 해도, 라집역(羅什譯) 『금강경(金剛經)』의 제 모습을 온전하게 전하고 있는 유일무이(唯一無二)의 고본(孤本)이요, 고본(古本)이라는 사실에 있다. 라집역(羅什譯) 『금강경』판본 중에서도 온전한 진언이 텍스트로 붙어 있는 판본은 우리나라 해인사 고려판본 단 하나뿐인 것이다. 『대정(大正)』본만이 우리 해인사본에 따라 진언을 붙여놓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은 『금강경』을 말할 때 그것이 라집본(羅什本)인 이상에는 반드시 이 진언으로써 경(經)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금강경』이요, 참다운 우리 『금강경』이요, 고려제국 사람들의 섬세하고 위대한 손길이 담긴 세계적인 『금강경』인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라는 진언을 빼먹으면 『반야심경』의 맛은 반감된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의 그 모든 것의 실제적인 종교적 의미는 그 진언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금강경』의 지혜도 이 진언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진언이란 나의 육신의 발성기관의 진동이 아닌 우주의 소리요 신의 소리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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