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6. 주역과 중용의 공통점
학문의 기본은 정확한 이해와 비판력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에겐 이런 기본적인 텍스트 크리티시즘이 없어요. ‘못난 놈이나 고증학을 하는 것이지 우리는 사상만 가르친다.’라고 하는데, 사실 텍스트 크리티시즘이야말로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지 않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고전학자 중에서 텍스트 크리티시즘을 할 필로로기(Philology, 문헌학)의 능력을 갖춘 놈들이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시시한’ 고증학은 안 한다는 풍조 속에서 텍스트 크리티시즘에 대한 논문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나라 학문의 유치함입니다. 그러면서 일본학자들 보고 그놈들은 맨날 요렇게 조렇게 텍스트가지고 떠든다고 비판을 일삼죠. 그러나 텍스트 크리티시즘이 없는 학문은 학문이 아닙니다.
내가 한의과대학 다니면서 강의를 들어주기 가장 괴로운 문제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어요. 교수님들이 『황제내경(皇帝內經)』을 비롯한 고문헌을 중심으로 한 논의를 많이 하는데 이게 그냥 말일뿐 누가, 언제, 어디서, 왜 그렇게 얘기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도대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책에 이렇게 쓰여져 있다’라고만 하지요. 그것은 전도사가 교회에서 자기 멋대로 설교하는 수준이지 학자의 수준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불트만이나 독일의 신학대학의 교수 수준하고 우리나라 전도사 수준을 같이 비교해서 얘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한의과대학 교수님들께 이런 문제까지를 요구할 수는 없겠죠. 전공의 성격이 그런 문제를 깊게 다루실 여유까진 없으실 테니까요. 그리고 그런 학문방법의 전통이 서있질 않았고. 그런데 우리나라 일반대학의 교수님들의 한문 텍스트를 읽는 수준도 우리나라 전도사 수준도 안 됩니다. 전도사는 그래도 성경을 돌돌 외우기는 하잖아요?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철학하는 사람은 틀린 학설을 내놓아도, 그거야 어쨌든 관념의 유희니까 해는 없죠. 그런데 한의과 교수님들이 잘못할 경우에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볼만해요.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한의대 교수님들도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계신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시죠.
주역(周易)과 텍스트 크리티시즘
『주역(周易)』이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역(周易)’하면 태극기 생각나시죠? 네 가지 괘(卦)가 다 『주역(周易)』과 관계가 있는 심볼들입니다. 『주역(周易)』은 모두 64 괘(卦)이고 일괘(一卦)는 육효(六爻)로 되어 있는데, 효(爻)는 제일 밑에 것부터 1,2,3,4,5,6효가 되고 세 효씩 묶어서 상괘(上卦)ㆍ하괘(下卦)로 나뉩니다.
『주역(周易)』의 제일 처음에는 건괘(乾卦)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곤괘(坤卦)가 나옵니다. 이번 우리 통나무에서 과학사상 연구회의 『과학과 철학』이라는 무크지를 냈는데 이번호(제5집, 1994년 12월)에서는 ‘주역(周易)’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주역(周易)』에 관한 것 외에도 인제대학의 조용현 교수가 인류학적 관점에서 쓴 ‘도구·의식·언어’라는 글도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발달과정을 비교하면서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는지를 상당히 의학적이고 인류학적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주역(周易)』에 관한 논문들을 보면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들이 공들여 쓰신 글의 경우에조차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역(周易)』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역(周易)』은 도대체 어떤 책일까요? 『주역(周易)』은 상당히 복잡한 텍스트입니다. 흔히 문왕(文王)이 만들었다고 하는 괘들은 일종의 심볼이며 그리고 각 효에는 효사(爻辭)가 있습니다. 효사란 별게 아니고 새점을 칠 때 새가 입으로 물고 나오는 쪽지에 ‘동쪽으로 가면 재수가 없을 것이다’라는 말과 같은 거예요. 효사는 한 효에 한 개씩 붙어 있는데 64개의 괘에 각각 효가 여섯 개이니까 총 384개의 쪽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역(周易)』은 그 쪽지에 이런 작대기 같은 심볼을 해당시켰는데, 이 심볼과 각 효사를 합친 것만을 『역경(易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경이라고 할 때 기본적인 텍스트(Cardinal Text)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효사들을 동질적인 프레그먼트로 본다면 최소한 이 효사는 내가 보기에 상당히 오래된 것 같습니다. 심볼과 효사만 작게 쓰면 A4용지에 다 쓸 수 있을 정도인데 현대의 『주역(周易)』을 보면 분량이 방대합니다. 그것은 『역경(易經)』의 경(經)에 대해서 전(傳)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전(傳)은 후대의 사람이 경(經)에 대해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것인데 명백하게 후대의 작품입니다. 이 전(傳)이 바로 공자가 썼다고 전해지지만 사실은 전한 시대에 성립되었다고 추정되는 십익(十翼)을 가리킬 뿐이에요. 이 십익에 관한 논의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전(彖傳)·상전(象傳)·문언전(文言傳)·계사전(繫辭傳)·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잡괘전(雜卦傳)의 일곱 개를 말합니다. 그런데 단전(彖傳)·상전(象傳)·계사전(繫辭傳)을 상하로 나누어 전부 열개가 되는 것입니다. 『주역(周易)』도 첫 번째 건괘(乾卦, 重天乾)부터 서른 번째 리괘(離卦, 重火離)까지는 상경(上經)으로, 서른한 번째 함괘(咸卦, 澤山咸)로부터 예순네 번째 화수미제괘(火水未濟卦)까지를 하경(下經)으로 해서 둘로 나눕니다. 경(經)을 몸이라고 한다면 익(翼)은 날개 즉, 주석이나 부연을 말하죠.
원래 『주역(周易)』이라는 텍스트는 한 가지 괘를 놓고 거기에 효사(爻辭)를 붙인 것이고, 「단전(彖傳)」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에 관해서 육십사괘 각각에 대한 언급한 독립된 텍스트였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괘에 대한 상전, 단전 등의 내용을 뽑아서 원래의 괘속에 나누어 편집을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금의 『주역(周易)』을 가지고 옛날의 『주역(周易)』의 체계를 생각하지만, 요즘의 『주역(周易)』은 원래 『주역(周易)』과 많이 다른 것입니다. 경(經)·상전(象傳)·단전(彖傳)·계사(繫辭) 등이 모두 독립된 책들이었던 것입니다. 옛날 텍스트를 다시 만들려면 64개의 단전만 다 뽑아서 한 책으로 묶으면 『단전(彖傳)』이라는 책이 나오게 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같은 건괘 안에 있는 글이라고 해도 그것은 거기에 대해서 한 사람이 쭉 설명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시대와 사상을 달리하는 언급이기 때문이예요. 단전은 단전대로 유니크하게 시대와 사상이 달라요. 고고학적 발굴을 할 때 시대가 다른 여러 지층이 있는 것과 같이 『주역(周易)』에서도 수많은 지층이 발견됩니다. 그러니까 텍스트 크리티시즘이라는 것은 고고학자가 고고학적 유물을 발굴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다만 고전학자는 문자를 통해서 의식의 도구를 가지고 파고 들어가는 것이죠.
『중용』과 『주역』의 관계
그런데 지금 『주역(周易)』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중용(中庸)』이라는 책과 『주역(周易)』이 매우 깊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1장의 마지막에는 ‘치중화천지위언만물육언(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바로 位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역(周易)』을 전제하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는 말이기 때문에 『중용(中庸)』과 『주역(周易)』과의 관련성을 따지는 거예요. ‘『주역(周易)』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위(位)에 있느냐?’하는 문제인데 하늘과 땅이 위치를 정한다[天地位焉 萬物育焉]는 것이 무엇일까요? 건괘(乾卦)와 곤괘(坤卦)가 위치를 정하고 그 사이에서 만물이 자라난다는 것인데, 이 만물은 64괘에서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를 뺀 62괘를 말합니다. 『주역(周易)』 1장에는 이미 이러한 구조의 사상이 들어가 있어요. 이 『중용(中庸)』은 위와 같은 분석을 하지 않고서는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주역(周易)』의 괘의 하괘(下卦)와 상괘(上卦)에서 가장 중요한 효는 두 번째와 다섯 번째입니다. 『주역(周易)』의 괘에서 제왕의 자리는 제 5효인데, 4효는 5효에 비하면 불급(不及)이고 6효는 5효에 비해서 과(過)입니다【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둑 7급이 바둑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바둑 1급은 비슷한 상대를 만나기가 쉽지 않지요.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신영복, 『강의』, 103쪽】. 그리고 범인들의 세계에서 제일 좋은 자리는 제 2효입니다. 1효와 3효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역(周易)』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바로 중간(中, Centricity)의 개념입니다. 건괘의 단전(彖傳)을 보면 “대재(大哉)라 건원(乾元)이여 만물(萬物)이 자시(資始)하나니 내통천(乃統天)이로다 운행우시(雲行雨施)하야 품물(品物)이 류형(流形)하나니라 대명종시(大明終始)하면 육위시성(六位時成)하나니 시승육룡(時乘六龍)하야 이어천(以御天)하나니라 건도변화(乾道變化)에 각정성명(各正性命)하나니 보합대화(保合大和)하야 내리정(乃利貞)하니라 수출서물(首出庶物)에 만국(萬國)이 함령(咸寧)하나니라”라고 끝납니다. 참 기막힌 문장인데 지금 내가 해석할 수는 없고 『주역(周易)』을 찾아보십시오.
건(乾)이라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지요? 강(剛)을 상징하며, 곤(坤)은 유(柔)를 상징합니다. 그러면 결국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유(剛柔)의 중(中)이란 말입니다. 또한 중용(中庸)의 성(誠)과 관련해서 『주역(周易)』 건괘의 문언전(文言傳)에 보면 유명한 ‘한사존기성(閑邪存其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여튼 『주역(周易)』을 보면 계사(繫辭)라든라 문언(文言)·설괘(設卦) 이런 것들이 조금의 선후의 차이는 있으나 대개 동일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들의 사상을 분석해 보면 『중용(中庸)』 하편의 구조와 여기에 있는 프레그먼트들이 거의 동일해요.
따라서 『중용(中庸)』과 『주역(周易)』은 동일시대의 동일한 의식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나는 이것을 전한대(前漢代)라고 생각합니다. 이 판단은 분명한 이유가 있고 정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역(周易)』을 중국의 고문헌으로 생각하는데 『주역(周易)』은 전혀 고문헌이 아니예요. 64괘조차도 너무나 치밀하게 수학적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문왕의 작품일 수가 없어요. 이런 수학적 치밀성은 그렇게 고대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음양론이 성립한 이후에 나타난 장난임에 틀림이 없다고 나는 봅니다. 많은 중국의 학자들이 도기(陶器)에서 『주역(周易)』 심볼의 원형을 찾는 짓거리들을 하는데 그것은 다 쓸데없는 일이예요. 『주역(周易)』의 성립 시기는 절대로 그러한 방법에 의해서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중용(中庸)』이라는 텍스트를 『주역(周易)』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지금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해도 여러분들이 『주역(周易)』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계속할 수가 없군요. 그러나 쉽게 얘기하자면, 『중용(中庸)』은 『주역(周易)』의 「계사(繫辭)」와 동시대의 작품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결론입니다. 이러한 텍스트의 이해는 고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방법론입니다.
2011년에 나온 『중용한글역주』에서 중용의 저자가 바뀌다
자사, 공자의 사상을 흡수하다 |
사상가 자사의 모습을 통해 본 『중용』 저작의 가능성 |
『중용』의 저자는 자사다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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