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1. 사상의학과 중용학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의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는 큰 뿌리이며, 화(和)라는 것은 천하에서 언제 어디서나 달성되어야 할 길이다. 중(中)과 화(和)의 지극한 데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이 각기 바른 위치와 공능을 갖게 되고 만물이 잘 자라게 된다. 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皆由此出, 道之體也. 達道者, 循性之謂, 天下古今之所共由, 道之用也. 此言性情之德, 以明道不可離之意. 致, 推而極之也. 位者, 安其所也. 育者, 遂其生也. 自戒懼而約之, 以至於至靜之中無所偏倚, 而其守不失, 則極其中而天地位矣. 대본(大本)이라는 것은 천명의 성으로, 천하의 이치가 다 이로부터 나오니, 도(道)의 본체다. 달도(達道)는 성(性)을 따름을 말하니, 천하고금에 공유하는 것으로 도(道)의 쓰임이다. 이것은 성정의 덕을 말하여 ‘도가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치(致)는 미루어 지극히 하는 것이다. ‘위(位)’란 있는 곳에서 편안하다는 것이다. ‘육(育)’은 태어난 것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경계하고 두려워함으로부터 요약하여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치우치고 기울어짐도 없는 지킴을 잃지 않는 데에 이르면 중(中)을 지극해지고 천지가 자리 잡는다. 自謹獨而精之, 以至於應物之處無少差謬, 而無適不然, 則極其和而萬物育矣. 蓋天地萬物, 本吾一體. 吾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矣; 吾之氣順, 則天地之氣亦順矣. 故其效驗, 至於如此. 此學問之極功, 聖人之能事, 初非有待於外, 而修道之敎亦在其中矣. 是其一體一用, 雖有動靜之殊, 然必其體立而後用有以行, 則其實亦非有兩事也. 故於此合而言之, 以結上文之意. 홀로됨을 삼감으로부터 정밀히 하여 물건에 응하는 곳에 조금도 어긋남과 오류가 없어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않음이 없음에 이르면 화(和)가 지극해지고 만물이 길러진다. 대저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하나의 몸이다.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또한 바르고, 나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 또한 순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공효의 체험이 이와 같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학문의 지극한 공이고, 성인의 능한 일로, 애초에 외물을 기다릴 게 없이 ‘수도(修道)’의 가르침이 또한 그 가운데 있다. 이것은 하나의 체와 하나의 용이 비록 움직이고 고요함이 다르지만 반드시 체가 선 이후에 용이 행해지면 그 실제는 또한 두 가지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합하여 그것을 말함으로 윗 문단의 뜻을 결론지었다. |
투쟁을 통해 이룩해야만 하는 사회
대본(大本)은 본체론적 세계이고 달도(達道)는 현상론적 세계이며, 대본(大本)은 체(體)의 세계이고 달도(達道)는 용(用)의 세계입니다. 불교의 ‘체용론(體用論)’으로 중화를 해석하는 이론들이 송(宋)·명대(明代)에 오면 많아지는데 특히 명나라 때에 많습니다. 그러므로 대본(大本)과 달도(達道)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고대인들은 언어를 쓰는 방법이 아주 치밀하거든요.
한문을 좀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한문 구절은 줄줄 외우면서 아무 생각도 안하고 ‘대본(大本)·달도(達道) 참 좋은 말이다’하고 그냥 넘어갑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한문 실력이라는 거예요. 우리나라의 한학은 썩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그냥 그렇게만 가르쳐 주고 외우라고만 하면 아무 의미가 없죠. 이 책을 쓴 사람들은 한 글자 한 글자를 명백하게 선택해서 썼다는 걸 알아야 해요.
달(達)은 달성해야만 하는 당위(Sollen)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중(中)은 인간존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和)는 교(敎)를 통해서 애써서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양사상을 그냥 두리뭉실하게 조화사상이라고들 하는데 웃기는 얘기입니다. 조화는 거저 되는 게 아니다! 조화는 달도(達道), 즉 인간이 투쟁해서 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은 부조화를 조화로 달성시키려는 사상이라는 점을 깊게 새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양사상하면 다 조화되어 있고 그냥 뭉뚱그려서 좋은 것인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동양 사람들도 부조화된 현실의 괴리와 억압과 차별의 문제를 매우 깊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쓴 거예요.
에콜로지, 하늘과 땅의 경영권을 가진 인간의 책임
문명의 최대의 목표는 중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는다’이 말은 오늘날 에콜로지(Ecology)와 같은 문제의식의 소산입니다. 유가에 의하면 이미 하늘과 땅에 대한 경영권이 인간에게 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재론(三才論)이죠. 인간이 잘못하면 하늘과 땅의 위치가 허물어져 버린다는 거예요. 오늘날 모든 생태학적 문제는 바로 천지가 제자리를 못 찾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책임이 있다고 중용(中庸)사상은 그것을 말하고 있어요. 인간은 인간존재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행위는 천지의 자리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에콜로지 사상을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지가 바로 자리를 잡아야만 그 속에서 만물이 제대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 만물 중의 하나가 인간이고 그 인간이 만든 것이 문명입니다. 그리고 그 문명을 이룩하는 것을 과정과 실재가 곧 교육입니다.
이 『중용(中庸)』 1장은 동양문명의 대서설입니다. 제2장에 나오는 ‘중니왈 군자중용 소인반중용(仲尼曰 君子中庸 小人反中庸)’과 같은 구절과는 차원이 달라요. 텍스트 상으로 1장과 2장은 너무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1장은 대문명의 구상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씌여진 논설(Treatise)이고 이 논설은 진한제국(秦漢帝國)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중용(中庸)』 1장의 저자는 인간의 문명과 천지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그리고 인간은 거기서 무엇을 해야만 되는가라는 거대한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중용
중용(中庸)사상을 이제마 식으로 말하면 희노애락(喜怒哀樂)에 해당되는 각 장기에 과불급이 생기는 현상이 바로 체질, 즉 사상(四象)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마의 사상(四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질상의 폐비간신의 과불급을 어떻게 중(中)의 상태로 가지고 가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너무 감정에 치우쳐서 과불급이 생기면 불건강하게 되거든요. 이것이 이제마가 생각하는 건강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중(中)과 화(和)를 실현하는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인 것입니다. 폐비간신의 문제는 약리상으로 조절할 수가 있습니다. 간이 너무 큰 사람은 계속 간땡이 부은 짓만 하고 그 사람의 과불급의 상태로 그 방향으로만 발전이 됩니다. 이런 환자에게는 의인이나 길경, 대황 등 간을 치는 약을 씁니다. 신(腎)기가 샌 사람은 하초가 강해서 항상 빳빳하게 꼴려 있는 놈들입니다. 결과적으로 맨날 밑으로 쏘고 너무 많이 쏴서 하초가 항상 불안해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비(脾)가 약해집니다. 섹스가 강한 사람들은 대개 소화가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비(脾)가 더워져야 하는데 거꾸로 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속을 덥히는 인삼, 부자 같은 약을 씁니다. 이런 사람들은 변비가 심해요. 어깨가 좁고 호리호리하면서 엉덩이가 큰 빠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걸들은 술은 잘 먹고 안 취하는 데 소화기는 매우 나쁘죠. 그런 사람은 똥을 싸도 매일 깨질깨질 하거나 아니면 변비로 고생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며칠씩 똥을 안 눠도 그저 그래요. 이제마는 이런 사람에게 콩알 반쪽만큼만 먹어도 설사를 하는 파두와 같은 무서운 약을 몇 알씩이나 씁니다. 그래도 끄떡없습니다. 이제마는 파두가 더운약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극독이라는 것은 무섭게 더운 약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조선 성리학에서 이런 문제는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허한 대로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신대비소(腎大脾小)한 소음인(小陰人)들은 항상 파두만 먹으면 잘 살 수 있을까요? 보리와 생강을 같은 온도에 달여 먹더라도 전혀 다릅니다. 보리차는 뜨거운 것을 마셔도 시원합니다. 이것은 보리는 겨울 내내 얼음장 같은 땅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질이 냉한 탓이예요. 그래서 속이 더운 소양(小陽)인들이 먹어야지 소음(小陰)인들이 먹으면 안 좋습니다. 소음인들은 생강차를 먹어야 합니다.
집일(執一)이 좋은 것이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최악의 수다
그렇다면 나는 속이 냉한 체질이니까 항상 부자, 육계, 생강, 인삼, 계피 등 더운약만 먹으면 나의 성정(性情)도 조절되고 희노애락(喜怒哀樂)도 다 잘 될까요? 이제마는 이것을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호연지기(浩然之氣)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호연지리(浩然之理)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리만으로는 건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라는 책에서 내린 이제마의 결론입니다. 인간으로서 건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정을 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용론(中庸論)으로 다시 복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의사가 다스릴 수 있지만 호연지리(浩然之理)는 자기가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호연지리(浩然之理)’를 다스리려면 책심책기(責心責氣)하라고 이제마는 말합니다. 자기 마음을 책망하고 자기 기(氣)를 책망하라는 거예요. 그래야만 인간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마의 ‘성인론(聖人論)’입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은 기본적으로 중용학(中庸學)입니다. 『중용(中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지요. 『중용(中庸)』을 모르고 이제마를 얘기한다는 것 가소로운 얘기입니다. 한의과 대학 교수님들이 이런 고전을 제대로 공부해서 문헌을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이런 배경이 없으니까 한의학도 제 길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공부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한의학과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예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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