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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97장 - 아버지의 나라는 부지불식간에 밀가루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97장 - 아버지의 나라는 부지불식간에 밀가루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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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아버지의 나라는 부지불식간에 밀가루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97

1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의 나라는 밀가루를 가득 채운 동이를 이고 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2그녀가 먼 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고 가는 동이의 손잡이가 깨져서, 밀가루가 새어나와 그녀가 가는 길가에 흩날려 뿌려졌다. 3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4그 여인이 집에 당도했을 때, 그녀는 그 동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Jesus said,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like a woman who was carrying a jar full of meal. 2While she was walking along a distant road, the handle of the jar broke and the meal spilled behind her along the road. 3She did not know it; she had not noticed a problem. 4When she reached her house, she put the jar down and discovered that it was empty.”

 

 

나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논어499장의 로기온자료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두 개를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술이(述而)편의 시구야(是丘也)’팔일(八佾)편의 시례야(是禮也)’를 꼽겠노라고, 그런데 누가 나보고 도마복음서 중에서 두 장을 꼽으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4297, 이 두 장을 꼽을 것이다. 97장의 매력이 없었더라면 나는 나의 인생에서 예수를 다시 쳐다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수는 사람들이 몰라서 걱정이 아니라,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잘 알아 걱정이다.

 

2천년 동안 사람들의 짙은 지식의 안개 속에 가려져왔기 때문에 예수는 불행한 것이다. 예수는 양천년의 주석더미를 헤치고 나올 기력이 없다. 그는 이미 신학자들의 학설과 목사들의 교설더미 속에서 압사당하기 직전이다. 그런데 전혀 우리가 몰랐던 예수, 일체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거부하는 너무도 충격적이고 너무도 당혹케 하는 살아있는 예수의 비유말씀이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다. 양천년 동안의 인간의 온갖 똥찌꺼기가 한 방울도 묻지 않은 예수의 말씀이 여기 있다: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Th.14).

 

예수의 이 비유는 우리의 입에 의하여 더럽혀진 적이 없는 순결한 로기온자료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예수의 비유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한다. 일체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거부하는 이 비유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온갖 출전을 끌어대려고 안간힘을 쓴다. ‘있는 그대로 해석하라라는 나의 명제는 매우 명료하다. 보자! 나라(천국)는 밀가루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과도 같다고 모두(冒頭)에 밝혔으면, 이 여인의 행동의 결과가 곧 나라이다. 그 행동의 결과가 무엇인가? 바로 빈 동이! 빈 동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부정적인 맥락에서 해석될 수 없다. 그 핵심은 이다. 그런데 서구인들은 이 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나라는 바로 (Emptiness)’이었던 것이다. 이 최종적 사실에 대한 어떠한 다른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빔은 모든 생명의 가능성을 함장하는 것이며, 그것은 무한한 에너지의 잠재태이다. 빔이 있어야만 천지는 생성한다. 그것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이며,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며, 동정(動靜)()’이다. 예수는 노장적 사유에서도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이 비유를 해석하기 전에 나는 한 여인을 생각한다. 나의 아내의 할머니였는데 평안북도 의주 압록강이 멀지않은 아주 깊은 두메산골에서 사신 분이었다. 동네가 하도 읍내와 격절되어 있고 화전민 전답에 초가가 드문드문 박혀있어, 전설 속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이 할머니는 얼마나 강인한 생활력을 소유했는지 삶의 모든 것을 본인 스스로 해결했다. 삼대 과부가 그 두메산골 한 집에서 살았으니 이미 우리가 아는 여인의 연약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골이 장대했고 호연지기가 천지간에 뻗쳤다. 동경유학생인 며느리가 해산의 고통을 치르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애 낳는 것은 초근목피로 보릿고개 넘길 때 똥 눗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이 할머니가 바로 나의 아내의 친할머니였다.

 

제일 가까운 시장이래야 삼십 리 밖에 있었는데, 생필품을 매매하러 여인의 몸으로 홀로 산길 삼십 리 밖을 걸어갔다 오는 것은 다반사였다. 항상 큰 다라이를 정수리에 이고 다녔는데, 시장 갈 적에 빈 다라이를 이고 갈라치면 너무 심심하다고 큰 바위덩어리를 들썩 집어넣고서야 이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가는 길에 호랑이가 슬금슬글 따라오면 돌아서서 따라오지 말라고 호통을 치곤 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 97에 나오는 여인을 생각할 때 나의 아내 할머니를 연상한다. 나는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비문을 지었는데 이렇게 썼다: “무위의 세상이 여기서 종언을 고하다[무위지세(無爲之世), 우차고종(于此告終)]”

 

삼십 리 밖 시장에 가서 밀가루를 사서 동이에 가득 채우고 두메산골 집으로 돌아오는 한 팔레스타인 여인을 생각해보라! 팔레스타인 여인이 머리에 이는 항아리는 높이가 높고 손잡이가 아래쪽에 달려있다. 그 손잡이에 빵꾸가 나면 밀가루가 새어나간다. 그러나 밀가루가 새는 것은 그 여인의 뒤로 조금씩 흩날리기 때문에 전혀 눈치를 챌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상세하게 보도되고 있다. 노자 말을 빌리면 자연스럽게’ ‘스스로 그러하게[自然而然]’ 조금씩 새어나갔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챘더라면 매우 인위적인 복잡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밀가루를 사가지고 오는 이 여인에게는 많은 꿈이 있었을 것이다. ‘빵을 만들어야지.’ ‘국수를 빚어 잔치를 해야지,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 주어야지.’ 꿈에 부풀어 이 여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동이를 내려놓았을 때 동이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전부다! 더 이상의 아무런 해석의 실마리가 없다.

 

동이가 비어있는 순간, 이 여인의 모든 세속적 꿈이 사라졌다. 그것도 아주 편하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누굴 탓할 수도 없게 사라진 것이다. 바로 이렇게 세속적 꿈과 갈망과 소망(삶의 짐)이 사라지는 그 ’, 이 천국이라고 예수는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살아있는 예수의 방할(棒喝)이요, 방하착(放下着)이다: “내려놓아라! 그리고 비워라!”

 

이미 우리는 63에서 많은 꿈을 간직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그는 죽었다.’ 아무리 항아리가 밀가루로 가득차있다 한들 그것은 이미 허망한 것이다. 말씀의 발견의 충만함은 바로 항아리의 빔의 발견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또 어찌보면, 밀가루가 상실되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꿋꿋하게 살아가는 강인한 여인의 모습을 아버지의 나라라고 예찬하는 예수에게는 민중의 애잔한 삶에 대한 깊은 동정이 서려있을지도 모른다.

 

 

카파도키아 히타이트제국의 수도였던 카이세리(Kayseri), 로마황제 티베리우스(AD 14-37) 시대에 카이사레아로 명명되었다. 7세기 아랍이 점령, 셀주크가 1084년부터 지배, 1243년 몽골인이 도착, 몽골제국의 중요센타가 되었다가 결국 오스만제국으로 귀속된다. 이 모스크와 마드라사는 1249년에 지어져 1547년에 재건됨, 문양이 정교하다.

나는 카파도키아 데린쿠유에서 에데사왕국 우르파까지 750km를 하루에 달렸다. 새벽 4시에 출발하여 오후 4시에 도착했다. 이 길은 옛날 카라반들이 개척해 놓은 실크로드이다. 그러니까 이 길을 쭉 따라가면 중국 장안을 거쳐 신라 계림에까지도 이른다는 얘기다. 태고의 정적을 간직한 길이었다. 새벽 기운이 한없이 싱그럽다. 옆 계곡으로 만년설이 녹아 내리는 청정한 시냇물이 흐른다. 여기 사리즈(Sariz)라는 팻말이 보이는데 사리즈실크즉 비단이라는 뜻이다. 시냇물 이름도 사리즈 강, 즉 비단 강이다. 예수가 말하는 방랑하는 자들이 이런 길들을 걸었다. 이곳은 사도 바울의 전도영역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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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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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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