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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제26분 법신은 모습이 없다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26분 법신은 모습이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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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법신은 모습이 없다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26-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느뇨?”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觀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관여래불?”

 

26-2.

수보리가 사뢰어 말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須菩堤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觀如來.”

수보리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관여래.”

 

 

여기 수보리의 대답이 우리의 상식적 기대를 벗어나 있다. 분명히 여태까지의 일관된 논리구조 속에서 이를 논하면 분명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아서는 아니 되고, 또 그렇게는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바로 이것이 방편(方便) 설법이라는 것이다. 수보리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같이 듣는 뭇중생들을 위하여 자신을 낮춘 것이다. 즉 방편적으로 틀린 대답을 함으로써 부처님의 강도 높은 진리의 설법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수보리의 대답은 틀린 대답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재미난 문제가 개재(介在)되고 있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전혀 이런 다이내미즘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를 삼십이상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수보리는, “스승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스승님의 말씀을 이해한 바로는 여래는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때 스승님은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렇다! 정말 그렇다! 수보리야! 네 말대로다. 수보리야! 네 말 그대로다. 여래는 어떤 모습을 구비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

 

그렇다면, 여기 라집역(羅什譯)여시여시(如是如是)’는 수보리의 말이 아니라, 붓다의 말이 되어야 할 것이고, 무엇인가가 앞뒤전후로 하여 누락되었거나 잘못 개찬(改撰)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즉 텍스트의 오사(誤寫, text corruption)가 발생한 것이다. 정말 그런가??

 

앞뒤 문맥을 면밀히 검토할 때 우리는 텍스트의 오사가 일어났다고 볼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앞뒤 논리의 전개가 원문과 비교해보아도 그 나름대로의 정연한 논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라집(羅什)이라고 하는 위대한 연출가를 발견한다. 계속 반복되는 텍스트의 내용을 똑같이 번역ㆍ연출하는데 라집은 싫증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반어적(反語的)인 뉴전(扭轉, 비틀어줌)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루하지 않게 텍스트를 계속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번역은 제2의 창조라는 금언을 되새기기 전에 라집의 정신적 경지가 금강경의 기자(記者)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숭고한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이러한 뉴전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26-3.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만약 네 말대로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해야 될 것인가?”

佛言: “須菩堤! 若以三十二相觀如來者, 轉輪聖王則是如來.”

불언: “수보리! 약이삼십이상관여래자, 전륜성왕즉시여래.”

 

 

나의 번역은 라집(羅什) 말 그대로의 직역은 아니지만, 그 내면의 흐름을 표출시킨 의역이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이란 ‘cakravarti-rāja’를 일컫는 것인데 그 뜻은 바퀴를 굴리는 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바퀴라는 것은 인도 고대의 성왕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를 상징화하는 것으로, 적진에 자유자재로 굴러다니면서 적을 분쇄하는 무기인 것이다. 흔히 불교에서 법륜(法輪)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을 이렇게 우리의 무명을 쳐부수는 바퀴로 상징한 데서 생겨난 말인 것이다. 전륜성왕은 세속적인 통치자이지만 이와 같은 정의(正義)의 법륜(法輪)을 가지고서 이 세계를 통치하는 이상적인 지배자인 것이다. 플라톤이 꿈꾼 철인왕(哲人王, Philosopher King)’이나, 장자(莊子)가 말하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이나, 인도인이 말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은 동일한 세속적 메시아니즘의 표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금강경이라는 문헌이 전륜성왕으로 불리운 마우리아 왕조아쇼까왕의 치세 후에 성립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금강경기자의 레퍼런스는 암암리 아쇼까왕 같은 이에게 가 있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32(三十二相)’ 관념은 오직 붓다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이 전륜성왕 또한 32상을 구비하여 태어나며, 즉위할 때, 하늘로부터 이 윤보(輪寶)를 감득(感得)하여 그것을 굴려 전 인도를 정복하게 된다는 메시아적 전설이 공존(共存)하고 있었던 것이다.

 

붓다의 대답은 바로 이러한 32상을 구비했다고 하는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라 한들 과연 그를 여래로 볼 수 있겠냐고 비꼰 것이다.

 

수보리의 말대로 여래를 상으로 볼 수 있다면 그러한 상을 구비한 자로 여겨지는 전륜성왕이야말로 곧 여래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 붓다의 어조 속에는 종교가 결단코 정치에 아부할 수 없다는 날카로운 새카즘(Sarcasms, 비아냥)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를 많은 자들이 호국불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과거 신라에 있어서 이국(異國)의 발호로부터 불법(佛法)의 힘을 빌어 나라를 지킨다고 하는 호국(護國)의 관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역사적 상황에서 그렇게 형성된 것일 뿐 그러한 역사적 상황이 곧 종교의 본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는 나라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요즘처럼 선거때만 되면 종교가 들러리를 서지 못해 안달하는 이러한 추세는 호국불교, 아니 그 명분을 본따 덩달아 춤을 추는 호국기독교의 반동적 성격을 모방하는 추태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는 호국불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기독교는 호국기독교가 되면 필망한다. 오로지 불법과 하나님의 진리를 이 땅에 실현할 뿐인 것이다. 아무리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라 한들, 그를 여래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정치이념이라는 것은 아라야식(阿賴耶識, alaya-vijñāna)을 스쳐 지나가는 한 티끌도 아니 되는 것이다.

 

 

 

 

26-4.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깨달아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겠나이다.”

須菩堤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觀如來.”

수보리백불언: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응이삼십이상관여래.”

 

26-5.

이 때에, 세존께서는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시었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

爾時, 世尊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이시, 세존이설게언: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대화의 다이내미즘이 살아있고, 또 마지막 끝마무리도 아름다운 게송으로 재치있게 표현되고 있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어느 성당에 마리아상이 피 흘린다고 쫓아가고, 어느 절깐에 부처님상이 땀 흘린다고 달려가는 추태를 생각할 때, 금강경의 지혜야말로 그 얼마나 많은 인류사의 종교미신을 단절시킬 수 있는 신령스러운 말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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