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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99장 -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이야말로 나의 형제요 나의 엄마다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99장 -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이야말로 나의 형제요 나의 엄마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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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이야말로 나의 형제요 나의 엄마다

 

 

99

1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형제들과 모친이 밖에 서있나이다.” 2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형제들이요 나의 모친이니라. 3이들이야말로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니라.”

1The followers said to him, “Your brothers and your mother are standing outside.” 2He said to them, “Those here who do the will of my father are my brothers and my mother. 3They are the ones who will enter the kingdom of my father.”

 

 

공관복음서 모두에 병행한다.

 

 

(3:31~35) 때에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형제들과 자매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바로 여기 내 모친과 형제들이 있도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는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12:46~50)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형제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형제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있나이다하니, 말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형제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하시더라.

 

(8:19~21) 예수의 모친과 그 형제들이 예수에게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혹자가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형제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있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형제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 사람들이라하시니라.

 

 

공관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어떠한 이념성이나 연역적 전제를 놓고 꾸며낸 이야기라기보다는 역사적 예수의 한 실황의 보고와 같다는 느낌을 주는 특이한 사례이다. 불트만은 이 이야기도 후대의 교회공동체의 산물이라고 보았고, 크로쌍은 마가 자신의 창작이라고 보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전승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도마복음서에 실려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역사성에 대한 확신에 무게를 실어준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보고자가 예수의 제자들, 도반들이 아닌 객관적인 아웃사이더로 되어있다. 도마에는 따르는 자들, 즉 도반들이 보고한다. 그러니까 도마의 이 이야기는 도반들의 인식의 미흡처를 깨우치는 말이다. 도마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가 마가에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로 되어있다. ‘아버지에서 하나님에로의 변화만 빼놓고는 양자는 동일한 표현이다. 마태는 기본적으로 동사와 목적어에는 변화가 없지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다라고 하여 초월적 의미를 보강시켰다. 항상 판에 박힌 듯이 나타나는 마태의 변용이다. 마태복음 자체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제자로서 종말의 왕국에 참여케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다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명백하게 누가가 마가자료를 다듬은 것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구성으로 보면 도마에 가장 근접하는 것은 누가자료이다. 누가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라는 마가-마태에 나타나는 중간부분이 없다. 그것은 어찌 보면 예수와 예수가족간에 어떤 분쟁적 감정 같은 것을 반영할 수도 있다. 누가는 그러한 사적인 것을 일체 보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 마지막 구문에 도마에는 형제들 - 모친의 순서로 되어있는데 누가에는 모친 - 형제들의 순서로 되어있다. 마가와 마태는 형제 - 자매 - 모친으로 되어있다(세 단어가 다 단수이다).

 

4개의 단화를 놓고 전승의 계통을 확정짓기는 매우 어렵다. 내 생각에는 누가에게 마가자료와 도마자료가 같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4개의 단화가 모두 어떤 역사적 정황을 공통된 주제로써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다 일치하고 있다.

 

아주 톡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예수는 가정생활이 순탄한 사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사생아였을 가능성도 있고, 복음서에서 유년시절 설화를 제외하고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 우리나라 성경에 모두 아델포이(adelphoi)’동생들로 번역했는데 그것은 형제들로 번역해야 한다. 예수가 맏형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최소한 인간 마리아와 요셉의 자녀들은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가 행복하고 단란하고 순탄한 가정생활을 한 사람이라고 가정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빠에 대하여 그토록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면 그의 세속적 아버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는 예수에게 심오한 인격적 영향을 끼친 위대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헬레니즘 문명권의 정신적 성취를 흡수한 매우 개방적인 지적 자이언트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는 근원적으로 가족주의를 초탈한 삶이었다. 도마복음서에도 가족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부정적 언급은 계속 나타나고 있다(Th.16, 31, 55, 79, 101, 105).

 

동물세계에 있어서는 가족이라는 것은 종족번식을 위한 필연성의 범주 내에서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 필연성이 사라지면 가족은 해체된다. 그리고 전적으로 타자로서 유리되어 버린다. 지속적인 가족의 개념이란 인간에게 매우 특수한, 문명의 현상일 뿐이다. 예수는 천국운동을 선포한 사람이었다. 천국운동은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운동이었으며, 인간관계 그 자체의 보정이나 개선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 생물학적 혈연공동체를 뛰어넘은 어떤 새로운 이념 공동체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예수에게는 혈연의 정에만 끌리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혁명시킬 필요가 있었다. 가족이나 가정의 유대에 대한 부정은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말씀에 대한 긍정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예수에게 있어서 갈릴리의 가족공동체 속에 묶여 사는 삶과, 당대의 소외된 모든 사람에게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무소유의 단신으로 방랑하는 삶은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일자가 부정되지 않고서는 타자가 긍정될 수 없는 특수상황이 있었다. 이러한 예수의 역사적 상황을 우리는 좀 리얼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수에게는 공동이념을 받들며 공동식사를 하는 특수공동체가 있었다. 이러한 특수공동체의 멤버들, 즉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공동체의 사람들이야말로 우선적인 가족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혈연가족이라도 이러한 공동체의 순결한 멤버가 될 때에는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예수의 특수사례를 인류의 보편적 윤리로서 논의하는 것은 어리석다. 인간은 현재 야생동물이 아니다. 문명 속의 존재이며, 문명적 삶의 근원에는 역시 가정이라는 것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를 지켜보고 그 시신을 옮긴 장본인도 분명 예수의 혈연적 엄마 마리아였을 것이다.

 

예수의 훼밀리즘에 대한 부정의 대치점에 서있는 것이 유교(Confucianism)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의 새로운 에포크를 창조한 공구(孔丘) 본인은 그렇게 가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매우 순탄치 못한 가족사가 공자 선대로부터 후대에까지 이어졌다. 공구가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낸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극히 짧은 시기에 불과했다. 공자는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제자들과 함께 공적인 명분을 위해 살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동서문명에 대한 너무 쉬운, 범주적인 규정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되었든 공자가 되었든, 현존하는 우리가 되었든, 공생애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족주의의 우선시는 모든 것을 비생산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공적인 이념을 위하여 공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담론으로부터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궁극적 의미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타우루스 산맥(Taurus Mts.) 고원지대에서 아침 찬거리 나물(토마르자)을 뜯고 있는 아나톨리아의 여인

 

 

인용

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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