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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3장 - 2. 오래 실천하기 힘들다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3장 - 2. 오래 실천하기 힘들다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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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오래 실천하기 힘들다

 

 

子曰: “中庸其至矣乎! 民鮮能久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중용(中庸) 그것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오래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드물 뿐이다.”
 
過則失中, 不及則未至, 故惟中庸之德爲至. 然亦人所同得, 初無難事, 但世敎衰, 民不興行, 故鮮能之今已久矣. 論語無能字. 右第三章.
과하면 중()을 잃고, 미치지 못하면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중용의 덕이 지극함이 된다. 그러나 또한 사람이 함께 얻은 것으로 처음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다만 세상의 가르침이 쇠하여 백성들이 흔쾌히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드물게 그것을 행하여 지금은 이미 오래 지나 버렸다. 논어에는 ()’ 자가 없다. 오른쪽은 제3장이다.

 

주자 주()를 보면, ‘()은 상성(上聲)이고 하동(下同)이라()은 상성인데 아래 문장에서도 동일하다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어는 토날 랭귀지(tonal language), 성조어(聲調語)인데, 그리고 성조(聲調)는 네 가지, 즉 평성(平聲상성(上聲거성(去聲입성(入聲)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조(聲調, tone)란 것은 단음절(monosyllable) 단어의 발음의 고저에 따라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의미의 변화가 없으면 성조가 될 수 없죠. 예를 들어 ‘maˇ, má, ma, mà’에서처럼 높낮이의 변화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조선조 사람들이 한문을 외울 때 뜻만 외운 게 아니라 성조도 같이 외웠습니다. 독일어도 성()의 구별이 있어서 단어 하나하나마다 성()을 다 외워야 관사를 결정할 수 있듯이, 한문도 운서(韻書)를 같이 놓고 그걸 보아가면서 성조(tone)을 같이 외워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옥편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네모 속에 글자가 씌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네모 귀퉁이의 한 군데에 반드시 동그라미가 하나씩 있습니다. 좌변 아래쪽에 동그라미가 있으면 평성이고, 좌변 위쪽에 동그라미가 있으면 상성, 우변 위쪽에 동그라미가 있으면 거성, 우변 아래쪽에 동그라미가 있으면 입성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은 상성(上聲)이라고 할 때, ‘()’은 제1성 시앤이고, ‘드물다는 뜻이며 하동(下同)’이란 것은 앞으로 나올 선()이라는 단어는 모두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을 밝히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성에 따라서 의미가 바뀌기 때문이죠.

 

그 다음 주()를 보면, ‘지나치면 중()을 잃고 못 미치면 중()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의 덕()만이 지극한 것이다[過則失中, 不及則未至, 故惟中庸之德爲至].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위지(爲至)의 지()를 주자는 궁극적 기준(ultimate standard)의 의미로 풀었는데, 꼭 이렇게만 볼 게 아니고 여러 해석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가 주자 주()를 읽어주는 것입니다. 위에서 위지(爲至)’로 표현하는 걸로 봐서 주자는 지()를 명사적 용법으로 본 것이죠. 물론 지극하다는 형용사적 뉴앙스와 다다른다는 동사적 뉴앙스로 같이 들어있지만요.

 

그 다음 문장을 봅시다. “그러나 또한 중용(中庸)은 사람들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처음에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없다[然亦人所同得, 初無難事]” 위 문장은 1()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에서 배웠듯이, 어린애들 같은 경우를 미발(未發)의 상태로 볼 때, 특별히 그들에 대해서는 중용(中庸)을 논할 필요도 없고 어떻게 보면 걔들은 중용(中庸)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역사적 단계로 본다면 역사적 환경이 제대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중용(中庸)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도 되겠죠.

 

 

 

같은 내용의 다양한 전승

 

다만 도덕적 타락(moral degradation)으로 세상의 가르침이 쇠하여서 사람들이 중용(中庸)을 기쁘게 행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것<中庸之德>에 능한 자가 드물고[능하기가 드물고] 그런 상태가 지금 이미 오래되었다[但世敎衰 民不興行 故鮮能之 今已久矣].” 그 다음에 논어(論語)에는 ()’ ()는 없다[論語無能字].”라고 했는데, 이 말은 논어(論語) 옹야(雍也)을 보면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에서 ()’()’ 사이에 ()’자가 빠져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양고전에도 공관복음과 같은 텍스트 크리틱이 있다.

 

논어(論語)중용(中庸)의 이 문구(文句)는 똑같은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하면서 달라진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경우를 보면 네 복음서 즉,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이 있는데 같은 관점으로 쓰여져 있다는 의미에서 이것들을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the Synoptic Gospels)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에게 나눠주었는데도 그것이 없어지지 않더라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태·마가·누가복음은 스토리나 배열이 비슷하고 순전히 예수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한 체제인데, 요한복음은 좀 변조된 체제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빛이 있었나니하는 식으로 좀 철학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것이 영지주의(gnosism) 계통에서 성립된 복음서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고려하더라도 네 복음서는 공통된 점들을 많이 갖고 있죠. 서양의 문헌비평(higher criticism)이란 바로 이 비슷한 4복음서의 비교연구로부터 발전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자의 말에 대한 기록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공자가 춘추시대에 존재했다고 할 때 동일한 시간적ㆍ공간적 상황에서 공자의 말들은 똑같이 전해졌을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졌겠지요. 여러분이 내가 지금 강의하는 내용을 받아 적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내용을 필기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공자(historical confucious)의 동일한 말들이 제자들에 따라 약간 다른 내용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텍스트 크리틱(Text critic)이라는 것이 서양에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동양의 학문전통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선능구의(鮮能久矣)의 다양한 해석

 

그러면, 여기서 논어(論語) 雍也의 문장과 중용(中庸)의 문장을 비교하면서 해석을 해보도록 합시다. 주자 식으로 말하면 옹야(雍也)편의 구절은 중용(中庸)의 덕됨은 지극하도다 그러나 백성이 그것을 드물게 행함이 오래되었도다[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하는 식으로 해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좀 무리가 있는 해석이란 말이예요. ‘선구(鮮久)’에서 ()’을 동사 취급할 수도 있지만, ‘선구(鮮久)’를 한꺼번에 동사로 보면 ()’가 본동사가 되고 ()’은 조동사적인 성격이 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해석해 볼 것 같으면, “중용(中庸)의 덕됨은 지극하지만, 백성들이 그것을 오래 실행하는 자가 드물다(rarely practice)”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민선능구의(民鮮能久矣)’백성들이 그것에 능치 못한지가 오래 되었도다라는 탄식으로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선능구(鮮能久)’를 다 합쳐서 동사 취급했지요.

 

앞 구절의 지의호(至矣乎)’도 지극하다는 형용사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차라리 다음 문장과 대비시켜서 동사로 보자 이겁니다. 그러면 ()’이르다, 도달하다의 뜻이 되겠죠?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거야. “중용(中庸)은 대단한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거라서 이를 수는 있어(You can reach the eauilibrium). 근데 그것을 지속시키는 자가 드물다.” 그 말이야! 이렇게 되면 포인트가 능구(能久)’, 지속시킬 수 있다에 있게 되죠. 어때? 내 해석이. 더 근사한 것 같지 않아? 주자의 해석에는 좀 억지가 있어요. 물론 5장에 지금 도가 행해지고 있지 않구나[道其不行矣夫].’라는 탄식이 있긴 하지만(행하여지지 않고 있는 것이 오래되었다는 맥락으로 해석한다면 주자의 해석과 더 깊게 연결될 것이다), 나는 위와 같은 해석을 취한 것입니다. 내 해석과 같은 라인에 있는 것이 정현의 고주(古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현(鄭玄) 주를 보고 난 뒤에 내 학설을 주장한 게 아니라 내 학설을 먼저 내고 나서 혹시나 해서 정현 주를 보니까 그런 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요. 어쨌든 여러분도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치밀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실력을 키우라는 뜻에서 설명을 해 준 것뿐입니다.

 

자아 그러면 이 구절에 대한 나의 최종석 해석은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중용(中庸) 그것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오래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드물 뿐이다.

 

 

民鮮久矣(옹야), 民鮮能久矣(중용)
何晏, 邢昺, 鄭子, 朱熹 鄭玄, 茶山, 檮杌
백성이 이 덕 실천하기를 드물게 된 지 오래되다 백성들이 오래도록 실천하기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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